미색 드레스 입고 가다 [조선일보 김동섭 기자]
9일 장례식을 치른 ‘암투병 가수’ 길은정(44)씨가 죽기 전날까지 암과 싸우며 혼신의 힘을 다해 생방송을 진행한 과정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사람들을 울리고 있다.
길씨는 24시간 내내 진통제 모르핀에 의존하게 됐지만, 숨지기 하루 전인 6일까지 원음방송(89.7㎒)의 ‘길은정의 노래 하나 추억 둘’은 계속 진행했다. 길씨는 원불교의 원음방송 서울 본부장에게 “죽는 순간까지 마이크를 잡고 싶은 게 마지막 소망”이라고 말해 왔고, 방송국측은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지만,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후 길씨는 매일 두 시간 진행되는 방송에 모든 정력을 쏟았다. 길씨 언니가 방송국까지 매일 차로 데려다 주었다. 방송시작 2시간 전부터는 모르핀 주사도 맞지 않고 통증을 견디는 초인적 힘을 발휘했다. 모르핀 주사를 맞으면 발음이 부정확해지고 졸음이 오기 때문이었다.
지난 6일 길씨는 시청자들의 사연을 읽으면서 발음이 흩날리는 모습을 보였다. 길씨가 가쁜 숨을 내쉬며 “글씨가 두 겹, 세 겹으로 겹쳐 보인다”고 하자, 길씨 언니는 “내일부터는 방송은 그만 하고 방송국에 인사하러 오자”고 권했다. 길씨는 “내일까지는 하겠다”고 고집했지만, 이튿날 상황은 악화됐다. 길씨는 담당 PD가 대신 진행하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7일 오후 7시30분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길은정의 노래 하나 추억 둘’은 8, 9일 연속해 길씨 추모 특집 방송을 했다. 그의 사이트에는 수백 명의 추념객들이 “길은정씨의 예쁜 미소를 오래 간직하겠다” “하늘나라에선 아프지 말고 건강했으면 좋겠어요”라는 수많은 추모글을 남겼다. 길씨는 숨지기 사흘 전 자신의 팬 카페에 ‘내가 좋아하는 블루’라는 글을 남겼다. 1996년 직장암 수술을 받은 길씨는 작년 8월 골반암으로 전이됐고, 지난 10월 KBS-TV의 열린음악회 녹화장에서 넘어져 골반뼈를 다치면서 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길씨는 유언에 따라 수의(壽衣) 대신 1997년 KBS TV ‘빅쇼’<사진> 무대에서 입었던 미색 드레스를 입고 9일 경기도 벽제 승화원에서 화장됐다.
(김동섭기자 [ ds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