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필가 정목일
소재를 선택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순간적으로 마음이 끌렸거나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대상은 어떤 인연법에 따라 만나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낱말 하나, 풀 한 포기, 돌맹이 하나가 내 눈과 마음에 들어오기까지 나와 인연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긴 해도 생각 중에 눈맞춤해 두었기 때문에 낯설지가 않고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놓고 대화하고 싶어진 게 아닐까.
내 마음을 끄는 소재는 수수하고 소박하며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이다. 누가 한 번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을 듯 외로움을 간직한 대상들이다. 다가가 다정히 손을 잡아주고 말을 건네고 싶다. 소재의 선택은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자 만남이며,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하늘 아래 땅 위의 삼라만상이 수필의 소재가 되는 것이지만, 진정 소재가 되려면 은밀한 교감과 애정이 없으면 안 된다. 글을 쓸 대상을 깊이 사랑하지 않고는 영혼교감을 이루지 못하며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한 소재의 발견이야말로 삶의 오묘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머리를 숙이고 자세를 낮추어서 대상을 경이의 눈으로 들여다 보아야한다는 걸 알고 있다.
「본다」는 것은 예사로운 행위가 아니다. 순간적으로 살피는 것이지만, 일생의 총체성으로 한 사물과 만나는 일이다. 인생의 경지에 따라 보는 법이 달라진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체험한 것만큼 보이고 명상한 것만큼 보인다. 한 사물을 두고서, 한 번 보는 것으로 세상 이치를 터득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수십 번 보아도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소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작가의 개성, 취향, 관심, 전공, 기질에 따라서 다를 것이지만 마음의 눈이 밝아야 한다. 좋은 소재를 발견할 줄 아는 눈은 결국 좋은 인생을 볼 줄 아는 눈일 것이다. 마음 속에 맑고 깨끗한 거울을 달아두어서, 언제나 자신의 영혼을 맑게 닦아두어 가만히 들여다보는 사람, 마음 속에 해맑은 옹달샘을 파두어서, 넘쳐흐르는 물로 마음에 묻은 얼룩과 때를 말끔히 씻어낼 줄 아는 사람, 마음 속에 깊고 은은한 소릴 내는 종을 달아두어서, 양심의 종을 스스로 울릴 줄 아는 사람이 좋은 글감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마음의 연마가 필요하며 깊은 체험과 명상이 있어야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다. 수필쓰기는 결국 마음의 안목에 따라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인격의 향기, 깨달음의 꽃은 고도의 인생 경지에서 얻어진다.
주제 설정에도 작가에 따라 소임 같은 것, 역할 같은 것을 느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수필을 쓰는 분명한 이유가 드러나야 한다. 나는 체험을 통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담겠다는 소박한 뜻에서 한 걸음 나아가 평생동안 추구하고 탐구한 세계와 깨달음을 전하고 싶다. 민족의 고유한 미의식과 민족정서의 재발견을 수필문학을 통해 현대 감각에 접목해 놓고 싶다. 그 길을 가다가 쓰러진다면 행복하겠다.
구성은 없는 듯 있는 듯이 자연스레 이뤄진다. 의도성, 작위성이 아니라, 마음의 물결을 타고 자연스럽게 가락을 타고 이뤄진다. 비교적 짧은 글이기 때문에 치밀한 구성이 필요한 것인데도, 마음 속에서 써내려 가는 중에 무심결에 짜여지는 경우가 많다. 첫머리를 어떻게 꺼집어낼까, 이것을 생각하는 순간부터 명상 세계로의 몰입이요, 미의식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수필 구성의 요점은 서두다. 장마철 끝에 먹구름 속에서 파아란 하늘이 나타나듯이 서두가 풀리면, 전개 부분은 쉽게 이어진다. 마무리 부분에선 공을 들여야 한다. 이 세 가지 요건만으로도 3단계 구성이 이뤄지는 것이다. 나는 종전에 이미지 중심의 서정수필을 많이 써왔으나, 줄거리가 있는 서사수필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수필에 있어서 문장은 생명이요,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문장이 곧 사람이요, 수필 문장은 작가의 인생 경지와 품격을 드러낸다. 맑은 글에선 맑은 인생의 향기가 풍기고, 좋은 문장에선 좋은 인간의 삶을 느낀다. 픽션인 시와 소설과는 달리 수필은 논픽션이기에 작품이 곧 작가가 아닐 수 없다. 픽션은 작가와 작품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아도 되지만, 논픽션은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므로, 작가의 인생과 삶을 그대로 투영시킨다. 수필이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질적으로 높은 경지의 작품을 만나기 어려운 것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인간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필은 경지의 문학이 아닐 수 없다. 문장은 정확하며 깔끔하고 군거더기가 없어야 한다. 마음으로 타고 흐르는 가락이 있어야 좋다.
수필 한 편을 쉽게 발표하고 곧 후회하곤 한다. 고쳤으면 하는 데가 드러나 마음이 편하지 않다. 좀더 공을 들여서 내보지 않았을까 후회하곤 한다. 술도 오래 묵힐수록 맛이 나는 법이 아닌가. 한 소재를 마음에 담아 두고 정을 들이고 다듬어야 하며, 이 쯤 떠나보내야 그리워질 법할 무렵에 얼굴을 내놓아야 한다.
나는 수필을 쓰면서 하늘에 빌고 싶다. 가끔 은혜처럼 좋은 생각이 떠올라 부족한 마음을 채워주길, 눈에 띄지 않는 말, 순결한 말을 들을 줄 아는 귀와 평범 속에 깃들은 오묘한 세계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게 해달라고... 마음의 연마, 인생 도야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경지를 쉽게 가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닿을 수 없는 그 세계를 동경한다.
수필은 아무나 쉽게 쓸 수 있는 글이다. 친숙하고 정다워 꺼리낌이 없다. 남녀노소가 삶의 체험과 느낌을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글이다.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대중적인 삶의 문학인 동시에 좋은 글을 만나기란 실로 어려운 문학이다.
수필은 완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도달이 없는 깨달음의 도정으로 뻗어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