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의 물결

8월 15일, 제 72주년 광복절

목향 2017. 8. 17. 19:50


8월 15일, 제 72주년 광복절




8월 15일, 제 72주년 광복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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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光復節)은 한국 지역이 일본제국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주권을 되찾은 독립기념일이다. 매년 양력 8월 15일이고

대한민국에서는 국경일로 법제화함으로써 이 날을 기념하고 있다.


광복은 문자 그대로 “빛(光)을 되찾음(復)”을 의미하고,

국권을 되찾았다는 뜻으로 쓰인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날을 광복절 원년으로 계산한다.


해방 직후 미국소련을 통해 전개된 한국의 군정기에 따라

대한제국 지역은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었으며, 이후 양측 모두 이 날을 기념하지만 구체적인 의미가 다르다.


대한민국에서는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과정을 아울러 광복으로 명명하여 기념하고 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945년의 민족 해방만을

기념하며 정권 수립은 다른 날짜에 이루어졌으므로

인민정권 창건일로 따로 기념한다.


광복 이후[편집]

그러나 가혹한 압제로부터의 돌연한 광복은 과격한 흥분상태를 가져왔고

수많은 정당과 사회단체가 통일적 핵심체 없이 난립하게 되었다.


임시 정부가 곧 귀국하여 정권을 담당할 것을 기대하는

송진우 계통과 연합군이 진주할 때까지 민족대표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여운형 계통과의 행동이 분열된 것이다. 이리하여

여운형 계통에서는 안재홍을 비롯한 일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로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이때 잔류한 좌익세력은

소위 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조직을 급조하여 한민당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충칭의 임시정부와 대립할 기세를 취했다.


한편, 해외에서 독립운동 활동한 한국광복군

미군첩보부대 OSS와 함께 국내 진입작전을 추진하던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등 4명의 광복군 요원이 1945년 8월 18일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면서 해방된 조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무장한 채 여의도에 착륙한 이들은 미군이

"휴전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다시 오라."는 일본군의 협박에 굴복하는 바람에

다음날 오후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이 되어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9]


국내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이 첨예해갈 때에 미·소 양군이

각기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아 남북으로 갈라서 1945년 9월 한반도에 진출했다.


 남북한을 분할한 미·소 양군은 점령 지역에 군정을 실시하였다.

소련은 처음 조만식을 내세워 인민위원회를 조직게 하고 군정 하의

행정을 담당케 하였으나, 이어 김일성(金日成)을 위원장으로 하는

소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 공산주의 정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한편 남한에 진주한 미군도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의 모든 행정을 담당하였다.

미 군정은 정치활동의 자유를 허용하여 모든 한국인 정당에 대한 절대 중립 태도를

언명했다. 그리하여 송진우 등우 '한국민주당', 안재홍 등의 '국민당',

여운형 등의 '조선인민당', 박헌영(朴憲永) 등의

'조선공산당'을 위시한 50여 개의 정당이 난립하였다.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이 귀국하고,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도 귀국하였으나 혼란은 여전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광복절이란

19458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았습니다.

3년 후인 1948815,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는데요.


★광복절과 국치일☆
창피한 8월! 건국절-건국자도 없는 나라

 

 

1948년 8월15일 중앙청 앞에서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선서를 하는 이승만.

▲ 1948년 8월15일 중앙청 앞에서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선서를 하는 이승만.

 

 

 



“창피해...창피해...내가 창피해...”

 

 

이승만은 얼굴을 떨며 세 번이나 ‘창피해’를 연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강점으로부터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815일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했습니다.

'광복'이란 '빛을 되찾다'라는 뜻으로,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광복절에는 어떤 일이 있나


광복절에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독립기념관의 경축식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기념 행사가 거행되는데요.

광복절 경축식은 1970년부터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가 되었으며,

기념식에서는 <광복절의 노래>가 연주됩니다.


또한 전국의 모든 가정에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권장하고,

정부는 저녁에 외교사절 등을 초청해 경축연회를 베풉니다.

또한 광복회원 및 그 가족에 대한 우대

조치로 814일부터 16일까지 전국의 철도,

시내버스 및 수도권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하게 하고,

고궁 및 공원도 무료입장하도록 합니다.


광복절의 역사

 


 

 


 

 

광복절의 원래 명칭은 독립기념일?


미군정은 194510월 일제강점기의 경축일을 폐지했습니다.

한편 우리나라는 해방 3주년인

1948815일에 정부 수립을 선포했는데요.

폐지된 일제시대의 경축일을 대신해 국경일 제정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따라 19495월 국무회의에서

국경일을 제정해 815일이 독립기념일로 제정됐는데요.


1949101일 법률 53호로 공포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해 광복절로 명칭이 수정되었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매년 815일은 광복절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광복절의 세 가지 모습


우리 역사에서 815일의 의미는

'해방, 민족통합, 독립된 정부수립'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1946815일은 해방 1주년으로 비록

좌익과 우익으로 갈려 기념식이 치러졌으나

이때부터 815일은 전민족적 기념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1948년에 815일에는 정부수립을 선포함으로써

이날의 역사적 의의를 드높였습니다.

이에 따라 1949년 이후 815일은 광복과

정부수립의 중첩적 의미를 지닌 날이 되었습니다.



분단된 국가, 우리에게 광복절이란

한편 광복절은 때때로

남북 간 회담이나 선언이 이루어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8.15회담', '8.15선언'등의 단어가 낯설지 않은데요.


북한은 815일을 '조국해방기념일'로 지정하고 기념해왔는데,

최근에 '광복'이라는 용어를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독립기념관

 

 

 광복을 기억하는 공간

 

광복절이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시간인 것처럼

광복을 기념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독립기념관일 것입니다.

1945년 광복 이후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각계에서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을 계기로 독립기념관 건립을 위한

성금 모금과 역사자료 기증운동이 국내 · 외 각지에서 뜨겁게 일어났는데요.

15년 후인 1987815, 드디어 천안에 독립기념관이 개관되었습니다.

한편 일제의 지배를 상징하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5815일 철거됐습니다.


첨부파일 광복절노래(보훈처).mp3

 


 

01 광복절 노래 KBS 어린이합창단,전출연자

https://youtu.be/1gQRcKgzr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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