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타인의 글)

종이에 베이다

목향 2020. 1. 26. 15:32

종이에 베이다




스윽-
종이 한 장이 스친 순간
손끝에서 가느다란 핏물이 비어져 나왔다

물고기 비늘처럼 돋아나는
비릿한 통증

오후 두 시의 나른한 날빛 속에
희끗, 그의 흰 등이 보이다
사라진다

뒤늦게 비어져 나오는 신음을 삼킨다
베인 줄도 모를 만큼 무뎠고,
무뎌야만 했을 것이다

나를 오랫동안 끌고 다닌 것은
모호한 실금들,
나는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했다
그리고, 질문하지 않고
대답하지 않았다

스윽-
붉은 핏물을 닦아낸다

나는 하얀 종이처럼 스쳐 지나가기로 한다


- 김이안, 시 '종이에 베이다'


모르고 지나친 작은 상처들이 어느 순간 엄습해올 때가 있습니다.
스윽, 손가락 핏물을 닦듯 혹은 무딘 듯
나를 진정시키며 다시 지나가는 날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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