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혼자 사는 삶의 고독과 외로움을 나름대로는 즐겼다.
오로지 방송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
MBC FM의 '정오의 희망곡', MBC TV의 '쇼 네트워크',
KBS FM의 '3시와 5시 사이', SBS의 '사랑의 징검다리' 등…
나는 술도 못 마시는 데다 밖에 나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하는 시간 이외에는
거의 혼자 지냈다.
물론 이혼 후 처음 얼마 동안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정신적인 공백을 메워보려
시도도 했었다.
처음 신인 때는 정신없이 바쁜 스케줄에
밀려다니느라 친구나 동료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고,
결혼하고 나서는 유부녀라는 딱지 때문에
방송이 끝나면 총알같이 집으로 달려가다 보니
회식자리조차 빠져야 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렇게 사는 동안, 다른 동료들은 가깝게 지내며
자주 모이고 다음날 만나면 더욱 친해져 있는 분위기를
느끼면 내심 부럽기도 했었다.
사람들과 어울려도 남들은 다 취했는데
나만 멀쩡한 정신으로 분위기를 맞추다가
마지막엔 내 차로 각자의 집에까지 데려다 줘야 하는
기사 노릇으로 끝을 맺는 게 공식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 시간들이 재미없어지기도 해서,
사람들과 어울려 호프집에 가는 대신 혼자 스키를 타러 가거나
비디오를 빌려다 보고, 책을 읽었다.
그때 어찌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방송국 서점을
나처럼 드나드는 사람은 없었을 정도였다.
나는 다시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쉬는 날은 그 동안 미뤄두었던 청소며 빨래를 하고
잠도 푹 자야 했으므로, 현관문 한 번 열어보지 않고
집 안에서만 보내는 일도 허다했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쉬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든 만들어서 하고 마는 '일 중독증'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새벽반 강의를 들으며 외국어 공부에도 열심히 하였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해외 촬영도 다니며 강행군을 했다.
더 나이들면 하기 어렵다는 강박 관념에다가
쉽게 얻지 못할 소중한 경험들을 놓치기 아까워서
몸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최선을 다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때는 왜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을까,
모든 것이 부질없이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렇게 악착같이 굴었던 것은
바로,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야마는
내 성질과 책임감 때문이기도 했다.
예들 들면 스키를 잘 타게 된 것도 그렇다.
혼자 살기 시작하던
그 해에 난 처음으로 스키장을 가게 되었다.
함께 방송하던 팀과 서울 근교의 가까운 스키장에서
단체 강습을 받았는데, 그때도 그 근성이 발동한 것이다.
만약 내년에도 이들과 스키를 타러 오게 된다면
이들보다는 잘 타야겠다는 생각에
거의 매주 일요일은 야간스키를 타러 다녔다.
혼자 스키를 싣고 몇 시간을 운전해 스키장에 가
혼자 연습하며 한두 시간 스키를 타고,
또 몇 시간 운전해 돌아오는 일이, 스키 마니아인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직 흥미도 제대로 못 느낀 초보한테야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했던 까닭에 지금 나는 거의 선수 수준의
스키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처음 함께 스키를 배웠던
사람들은 아직 초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학기를 공부했던 일본어의 경우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웬만큼 듣고 쓰고 말할 수 있는데,
함께 공부했던 방송인 B모 씨는
그것을 홀랑 잊어버리고 말았단다.
그는 지금도 내가 가장 기초적인 일본어를 써서 인사를 해도,
"어, 그게 뭐였지? 무슨 뜻이었지?"하며 당황하곤 한다.
무슨 일이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방송일 또한 대단한 사명감을 갖고 대했는데,
예를 들자면 이런 거였다. 아파 쓰러지더라도
방송이 끝난 후에 쓰러져야 하고, 홍수가 나서
우리 집이 물에 잠겨도
방송은 하러 나와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가끔, 전쟁이 나면 방송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농담 삼아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나는 나야 어떻게 되든지 방송으로 상황을 알리고
사람들을 대피시킬 것이며, 만약 방송국이 점령당한다면
그래도 끝까지 남아 죽는 순간까지 방송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우스운 얘기지만, 아마 내가 타이타닉 호에 타고 있었다면,
구명정으로 도망가는 사람들 속이 아니라
사람들의 대피를 돕고
내 자리마저 양보하고 끝까지 남아
죽음을 맞는 그 사람들 속에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책임감과 사명감과 공명심에 불타며 열심히 했던
방송도 건강을 잃은 다음에는 물거품처럼
허무한 것이 되었다.
[출처] 혼자 이후의 시간들 ... 길은정 수필 (♡길은정 사랑 뜨락♡) |작성자 천상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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