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의 물결

김형석교수의 신앙과 인생

목향 2020. 2. 26. 13:28

 

 


100세의 노교수 김형석은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방안은 교회 지도자들이 책을 읽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가 그렇게 독서를 중시하는지 알기 위해서 그의 책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두란노, 2018)에 나오는 독서에 관한 조언에 귀 기울여본다. 

 


나는 대학을 정년으로 떠나면서 한 가지 사회적 봉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국민독서운동이었다. 20년 가까이 그 운동을 하면서 얻은 하나의 교훈은 우리 교회가 독서를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경우는 옛날이지만 좀 달랐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비교적 많은 책을 읽었기 때문에 신앙의 수준 높은 양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중학교 4학년이 되면서는 교회 설교에 대한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성경을 읽고 어느 정도 이해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목사님들의 설교가 대부분 같은 내용이었고, 신앙적 깊이를 더해 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했다. 어느 교회에서나 비슷한 설교였고, 반복되는 내용이 강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성경과 기독교 사상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대학 생활을 하는 4, 5년 동안에도 단 한 번밖에 한인교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내 친구를 교회에 안내해 주기 위해서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있는 예배 시간에는 언제나 일본 교회에 참석하곤 했다. 새롭고 깊이 있는 설교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 선택이 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한 교회에서는 대학생들이 성경공부를 하는 서클이 있었는데, 신약의 복음서를 히랍어 원전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 학생들을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목사는 더 많은 공부를 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점에 있어서는 미국의 흑인 교회나 보수적인 교단에 속하는 교회보다는 일본 도쿄 중심지의 교회가 앞서 있었던 것으로 본다. 도쿄에는 많은 대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함께 독서 운동을 해 온 사람이 목사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 교회 중심의 독서 운동을 시도해 보았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2017년 경의 일이다. 한 교단에 속하는 장로들을 위한 수련회의 초청을 받아 지방에 간 일이 있었다. 300명 정도가 모인 집회였다.
내 강연이 중심 되는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그중의 몇 사람쯤은 내 책의 독자가 있을 것이고 기념으로 사인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사인을 요청해 오는 사람이 없었고, 내가 어떤 저자라고 소개해 주는 사회자도 없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교회 계통이 아닌 일반 사회에 강연을 갔을 때는 적어도 몇 사람씩은 사인을 요청해 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당시에는 내 책 『예수』나 『어떻게 믿을 것인가』가 종교계의 베스트 셀러가 되어 신문에서도 화제가 되어 있었다. 『백 년을 살아 보니』라는 책은 10만 부 이상의 독자가 있을 때였다.
그 지방 모임이 끝난 얼마 후에는 서울의 같은 교단 본부에서, 주로 장로 중심의 평신도 지도자 양성 교육이 있었다. 일정 기간 평신도 지도자를 위한 교육이었다. 70명 정도의 회원이 있었던 것 같다. 그 회원들 가운데서도 내 책의 독자는 없었다. 다른 사회 기관에 가면 연수에 참석하는 전 회원에게 미리 내 책을 배부해 주는 경우가 많던 시기였다.
많은 교회에 다녀 보지만, 기독교 신앙에 관한 도서들을 교회에 비치해 두고, 목사님이 어떤 책을 읽으라고 권고하거나 저자를 초청해 강의를 듣게 하는 교회는 거의 없었다.
큰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고 저서에 관한 대담을 나눈 교회는 서울 한남동에 있는 나사렛교회뿐이었다. 교회에 여러 책을 비치해 두고 읽기를 권고하는데 내 책들도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천주교의 3, 4곳 성당에서는 내 저서를 중심으로 초청을 받아 신앙 강연을 겸한 일이 있었다.
지금도 나는 교회에서 자랐으나 직접 성경을 여러 번 읽었고, 성경과 기독교에 관한 책을 많이 읽은 것을 감사히 생각한다. 신앙의 90% 정도는 독서를 통해 얻고 터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TV 등을 통해 교회 설교에 관심을 갖는 때가 있다. 설교의 대부분은 성경의 반복이며 어느 목사님이나 비슷한 내용임을 볼 때,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높은 문제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하며 지성인들과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기독교적 해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이 칼 바르트나 R. 니버, P. 틸리히 같은 신학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만큼도 교회 지도자들이 독서를 외면하고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앞날을 위해 우려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젊은이들로부터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왜 스님들이 쓴 책은 베스트 셀러가 되어 많은 독자를 갖는데 목사님이나 신부님들의 저서는 그렇지 못하냐는 물음이다. 그런 생각을 갖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스님들은 인생에 관한 생각과 글을 쓰는데, 신부나 목사님들은 교리에 관한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책을 읽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했는가. 예수님은 인생의 문제와 사회 역사를 통한 하늘나라를 가르쳤다. 교리가 율법, 계명을 초월했던 것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계명과 교리를 위해 살았던 것이다.
독서는 성경이나 기독교 문제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 전체에 관한 문제를 알고, 그 해답을 구하는 일 중의 하나이다. 가장 소중한 과제이다. 그런 독서를 세상 사람들에게 맡겨 두고 그리스도인이 외면한다면 어떻게 기독교의 정신이 세상을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
사실, 세계에는 많은 나라와 인류가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전체 인류에게 문화적 혜택을 베풀어 주는 나라는 다섯 나라 정도이다. 그 다섯 나라가 없었다면, 우리는 문화의 태양 빛은 보지 못하고 어두운 밤에 사는 것 같은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다섯 나라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아시아에서는 일본이다. 독일 다음에는 러시아가 등단할 것으로 모두 믿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러시아가 공산주의를 선택하면서 1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상실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 다섯 나라 국민은 어떠했는가.
국민의 절대다수가 1세기 이상에 걸쳐 독서를 한 나라들이다. 지금도 그 5개국을 제외하고는 독서 수준이 높은 나라가 없다.
우리도 이광수, 최남선 같은 선각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독서 활동이 없었다. 그들과 후배들이 일본에 건너가 학업을 닦으면서 독서 습관이 유입되었다. 그 후에는 해방과 더불어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독서하는 풍토를 조성해 준 셈이다.
어떻게 보면, 독서가 가장 소중한 애국심이기도 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 독서를 포기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뜻하는 것은 독서를 위한 독서에 그치지 않는다.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계속하며 과거의 신앙적 개척자들과 지도자들의 사상을 뒤따르는 것은 필수 과제이다.
사회의 지적 수준은 해가 거듭될수록 성장하고 있는데, 교인들은 제자리에 머물러 만족한다면 그런 교회는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도 있다. 독서를 통한 신앙은 교회와 더불어 기독교 정신을 계승하기 때문에 언제나 사회적 지도 이념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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