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봉사에 들려 |
금강산 콘도를 떠나 건봉사로 들어가는 도로변에는 군부대가 두 세 곳 보이고 우리일행 (승용차 두 대) 차외에는 지나는 차량조차 보이지 않아 적막하다고 까지 표현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 같았다. 이곳이 최전방이어서일까, 군 초소에서 일일이 출입심사를 받을 때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약간의 두려움조차 일었다. 아무래도 최북단이니 조금은 긴장되나 보다.
약 40분쯤 달려 건봉사 입구에 다다랐다. 제일 먼저 반겨준 것은 청청하게 검 푸른빛을 발하며 기품 있게 서있는 우람한 소나무들이었다.
그 신령스러움이 시선을 끌기에 목이 아픈 것도 모를 정도로 쳐다보았다.
또한 도착해 보니 경내 여기저기 사람들이 보였고 그 드넓은 터에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 들이 한 눈에 보아도 꽤 큰 사찰임을 그대로 드러냈다.
* 주차장 입구 청청한 검푸른 빛을 발하며 기품있게 서있는 소나무
* 만해 대선사 시비
" 만해 대 선사 시비" 가 초입 좌측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일독하면서 음미했다.
" 내가 당신을 사링하는 것은 당신은 ' 나의 백발도, 나의 눈물도,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이라고 읊었다.
나의 백발도 나의 눈물도 나의 죽음도 사랑 한다니, 어찌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않을 수 있겠소 ."
한국 4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큰 절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도 북부 강원도 지역을 대표하는 31본산의 하나로 신흥사와 백담사, 낙산사 등을 관할했으나, 한국 전쟁으로 전소되면서 조계종에서는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로 편성되어 있다. 당시 폭격으로 수백 칸에 이르던 전각이 모두 타버려 폐허가 되었고, 지금은 현대에 새로 지은 건물만 단촐하게 서 있다.
민간인출입통제구역에 포함된 위치 때문에 한국 전쟁 이후 오랫동안 민간인은 석가탄신일 하루만 특별히 드나들 수 있었는데 1989년에야 전면 출입이 허용되었다 .
* 6.25 전잰중에도 파괴되지 않고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불이문 !!
위 팽나무는 강원도 기념물 제 51호로 지정된 건봉사지 내에서 약 500년 동안 자라왔던 나무로 한극 전쟁 중 766칸의 건봉사 사찰이 소실되었으나 유일하게 남아있는 불이문(1920년 건립)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 25호)를 지켜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성군에서는 건봉사를 지켜주는 상징 목으로 2008년 12월 12일 보호수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 520년(법흥왕 7)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원각사(圓覺寺)라 이름했다. 758년(경덕왕 17) 발징(發徵)이 중건하고 염불 만일회(念佛萬日會)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한국 만일회의 시초이다.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중건한 뒤 절 뒤쪽에 봉형(鳳形)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西鳳寺)라 개칭했으며 1358년(공민왕 7) 나옹(懶翁)이 중수하고 건봉사로 다시 바꾸었다.
1464년 세조가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願堂)으로 삼은 뒤 어실각(御室閣)을 짓게 되자 이때부터 역대 임금의 원당이 되었다. 6·25전쟁 전에는 대웅전·관음전·사성전·명부전·어실 각·불이문 등 총 642칸에 이르렀으나 6·25전쟁 때 거의 폐허화되었다.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불이문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에도 8기의 탑, 48기의 부도, 31기의 비석, 44점의 고승영정 등이 있었다.
* 범종각은 좀 멀리 떨어져 외롭게 서 있었는데 그 은은하고 여운있는 범종 소리가 멀리 퍼지는듯 환청으로 들렸고
범종각 뒤로 펼쳐진 청산을 보면서 "운보" 화가님의 그림 <청산>을 떠올렸다.
* 동생들이 안내판을 읽어보면서... 바로 왼쪽 다리를 지나면 대웅전이 나타난다.
* 두 동생이 너무도 간절한 염원을 담고 ..... 뒤를 이어 나도 3배를 올렸다. 그냥 '감사하다.'는 생각만들었다.
이렇게 관광할 수 있어 고맙고, 금년 내가 제일로 염원하던 11월 막내의 <일륜지대사>를 치룰 수있어 감사하다고 ,
정말, 진실로 감사하다고 ...
* 공산군 5개 사단이 16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건봉산 전투 전적지이며, 이 때 건봉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나 1994년부터 대웅전, 팔상전,
염불만일원, 종각,
사지 등이 각각 복원되었고 지금도 사찰복원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전쟁전 건봉사는 총 642칸과 보림암 등 124칸의 18개 부속암이 있었다고 합니다.
* 임진왜란 때에 왜병이 일본으로
가져간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를 (당시 통도사에 모셔져 있던것을 )
사명대사가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다시 찾아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 부처님 진신사리
* < 미안마> 에서 진신사리를 , 해인사에서 성철스님 사리를, 세번째로 이곳 건봉사에서 진신 사리를 친견하게 되었다.
보고 또 봐도 신비스럽다. 정말? 수행에 의해 생겨진 것일까? 이러면 않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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