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갤러리2(펌)

대한민국 현대화의 주역 아산 정주영 / 옮겨옴

목향 2011. 6. 2. 21:32

 

 

 
 

산  정주영 10주기 추모사진전.

 

대한민국 현대화의 주역  현대의 창시자 아산 정주영의  

혼을 보는 듯 했습니다.

 

 

▲  인류의 모든 발전은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주도 아래 이루워 졌다.

아산  정주영

 

 

 ▲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때도

"한번 해보기나 했어?" 라는퉁명스러운

반문과 함께, 불굴의 추진력과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난관을 돌파해 나갔다.

 

 

 ▲  청년 峨山의 모습이다. 

峨山은 서울로 올라와 힘겨운 막노동을 하면서도

"오늘보다 내일"을

확신하며 열심히 일을 했다.

 

 

▲  峨山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전시 수도인

부산에서 미군 공사를

수주하며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사진은 미군 공병 장교 맥칼리스터 중위와

함께 한 峨山(왼쪽 다섯번째). 통역을 맡았던

동생 정인영(왼쪽 세번째)

 

 

 ▲  峨山이 미군과 공사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峨山은 미국 아이젠하워 대톨령이

1952년 12월 부산 유엔군 묘지를

방문했을 때 낙동강 변의 겨울 보리를 옮겨 심어

파란 잔디처럼 보이게 했다.

이 아이디어로 미군의 신뢰를 얻게 된 峨山은

미국 공사를 독점하다시피

할 수 있었다.

 

 

 ▲  현대건설은 1953년부터 1955년까지

대구 인근의 고령교 공사를 맡아 큰

손해를 보면서도 끝까지 공사를 완료했다.  

덕분에 1957년 9월 전후 최대의 단일공사였던

한강인도교(현재 한강대교)

공사를 착공해서 1958년 5월 준공시켰다.

사진은 1958년 5월 한강인도교 개통 모습이다.

 

 

 ▲  1964년 현대시멘트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박 정희 대통령과 峨山 내외.

峨山은 국내 건설사업의 촉진을 위해서는 건설자재의

국산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시멘트 공장을 건설했다.

 

 

▲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고작 105달어에 불과했던 

1965년 14억 7.900만원

이라는 어마어마한 공사 금액이 걸린 프로젝트를

수주함으로써 한국 건설업계

최초로 해외 진출에  성공했다.

峨山은  이 공사에서 엄청난 적자를 보왔지만,

최신 장비 사용법과 선진 공법을

익힘으로써 후일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완벽한 기술력을 갖출 수

있었다. 사진은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현장을 살펴보는 峨山의 모습이다.

 

 

 ▲1970년 7월 "단군 이래 최대의 역사"로

평가받는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1970년 7월 峨山의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국가의 대동맥으로서 대한민국 사회, 경제 문화 발전의

근간이 되었다.

특히 1968년 2월 착공해 2년 5개월만에 428km의

고속도로를  완공함으로써

세계 최단시간 완공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열사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 사막에

주베일산업항 건설의 한국 신화를 세우다.

 

 

 ▲  1975년 국산차 최초의 고유 모델 포니 생산.

 100% 국산차 "포니"로 세계를 놀라게 하다.

 

 

 ▲  천수만 방조제 공사에서 최종 물막이 공사는

난제중의 난제였다.

峨山은 일명  "유조선 공법"을 창안해 물막이

공사를 성공했다.

 

 

▲  1983년경 현대중공업에서 직원들과 어울리고 있다.

峨山은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그들의 희망에

귀 기울이는 격의없는

 경영주이기를 원했다"고 했다.

 

 

 

 

 ▲  하계수련회에서 직원들과 씨름하는 峨山

 

 

 

 

 ▲  1975년 8월 현대건설 신입사원 하계 수련대회에서

파안대소하는 峨山

 

 

▲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한 88서울올림픽 유치!

1981년 5월 올림픽유치민간추진위원장을 맡은

峨山은 현대의 임직원들과 함께

올리픽 유치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다.

당시 정부는 "창피만 당하지 말라"고 요청했지만

峨山은 "반드시 유치하자"고

결심했다.    

 사진은 서울 올림픽 유치 확정서에 서명하는 峨山 

 

 

 

▲  1978년 울산대학교 입학식에서 치사를 하고있다.

峨山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울산대학교와

현대고등학교를 설립했다.

 

 

 ▲  1998년 6월 16일 峨山은 서산농장에서 키운

"통일소"를 몰고 북한을 방문했다.

분단 이후 정부 관리의 동행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판문점을 통과한

첫번째 인물이었다.

 

 

 ▲  1989년 소련 방문 길에 

이 명박 대통령(당시 현대건설 회장)과 함께.

 

 

 ▲  매일 새벽 3시 30분이면 기상해 하루 일과를

시작했던 峨山.

청운동 자택으로 찾아 온 아들들과 아침 식사를 같이

한 뒤, 걸어서 계동 사옥으로

출근하는 것이 관례였다.  

 왼쪽부터  몽구,  몽준,  峨山,  몽근,  몽헌.

 

 

▲  峨山은 변 중석 여사와 스물 네살에 결혼했다.

변 중석 여사는 아내이자  어머니,

맏며느리로서 소박하고 조용한

성품으로 대가족을 보듬으며 峨山을 평안히 내조하였다.

사진은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촬영한 것이다.

 

 

▲  1985년 11월 고희를 맞아 변 중석 여사와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峨山은  "아내가 재봉틀 한 대를 유일한 재산으로 아는 점,

부자라는 인식을 전혀 하지 않는 점"을 존경한다고

밝힌 바 있다.

 

 

 

 ▲  설 날 모 습

 

 

▲  " 시련이란.  뛰어 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엎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아산 정주영의 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