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처음 국기 이름은 '조선국기'
우리나라의 국기가 맨 처음 만들어졌던 조선왕조 시대 때에는
나라의 이름인 '조선'과 함께 '조선국기'라 불렀다.
당시 조선왕조를 나타내는 국가의 명칭이
'조선'이었기 대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1882년 최초의 국기가 만들어지고나서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기전까지
27여년 동안은 '조선국기'로 불리어져왔었다.
태극기라는 말의 유래
'조선국기'가 '태극기'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하던 때부터였다.
18세기 말엽 조선왕조는 관리들의 당파 싸움과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나라 꼴이 허약해기기 시작하였다.
이런 기회를 노려오던 일본은
마침내 1910년 조선왕조를 송두리채 빼앗아갔다.
이에 격분한 애국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으로 일본에 맞섰다. 1919년 3월 1일 정오에 맞춰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전국적으로 대한독립 만세 운동를 펼치기로 하였다.
이날 참여한 모든 국민들은 누구를 가리지 않고 손에 손에 '기'를 들고 나오기로 하고, '기' 제작을 하였는데,
그때만해도 '조선국기'로 부르던 국기 이름을
일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태극기'로 부르자고
약속을 하면서부터 새롭게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일본 경찰은
탑골공원이며 종로거리이며 동대문 성벽까지 가득 메운 인파들이
그렇게도 많은 태극기를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하여
매우 당혹한 나머지 태극기를 든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팔뚝을 자르는 등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
우리나라 애국지사들은 중국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만들고,
국기를 바라보며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해방되기 3년전인 1942년 3월 1일에는
한국 임시정부수립 23주년 3.1절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거기에 국기 이름을 '태극기'로 정하고 그 존엄성을 명문화 하였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태극기가 국제적으로 사용된 것은 실로 1882년의 일이며,
그로부터 태극기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3.1대혁명 발동에 있어서도 여전히 태극기를 썼으며,
그 깃발은 혁명군중의 선혈에 물든 채 적의 총검 위에 꽂혀졌다.
이처럼 태극기는
3.1대혁명의 발동을 위해서도 없을 수 없는 큰 힘이었으니,
한국 주권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역사의 빛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태극기에는
부숴질 수 없는 존엄과 인상이 아로새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인 살고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한 폭의 태극기를 걸어 놓고 자신이 조국을 잊지 않고 있으며,
나라를 되찾겟다는 민족적 신조를 간직하고 있다는
결심을 표시하여 왔다.」
우리나라에서 국기 문제가 처음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876년에 있었던 병자수호조약을 맺을 때 부터였다.
조약을 맺기 1년전에 일본은 우리에게 문호 개방과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 초지진에 우리의 허락도 없이 군함 운요호를 정박시켰다.
강화도를 지키던 우리 수비병대가 즉각 대포를 쏘며 대항을 했다.
이런 과정에서 군함 운요호에 게양된 일본기가 불타 버렸다.
이 사건은 이듬해 강화도 회담에서 우리정부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즉, 군함을 허락없이 정박했다 하더라도 국가를 표시하는
일본기를 엄연히 게양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포격을 하게된 이유를 따지자,
우리 정부는 속시원하게 대답할 길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만해도
우리 정부에서는 국기라는 말 조차도 없었으며,
도대체 무엇을 국기라고 하는지 조차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난처한 입장을 눈치 챈 중국은 황준헌이라는 사신을 통해
삼각형 바탕에 용을 그린 중국의 용기를 본받아
국기로 그려 사용할 것을 간섭하기도 하였다.
그후 우리나라와 중국은 아예 국기 만들기 연락 사신을 임명하여
수시로 접촉토록하였는데 우리나라측 사신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은 마건충이었다.
이때만해도 우리나라는
국기에 대하여 마땅한 식견을 가지고 있지 못한 터라
이미 대륙을 상징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 중국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국이 우리나라의 국기에 대하여 집요하게 간섭을 하게 된 까닭은
조선왕조의 땅 한반도를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국기를 만들어야겠다고 나서게 된 것은
1875년에 있었던 일본 군함 운요호 사건 때문이었다.
일본은 일방적으로 우리의 문호를 요구하면서 허락도 없이
강화도에 그들의 군함 운요호를 무단 정박시켰다.
이에 격분한 강화도의 우리 수비병대는 즉각 대포를 쏘며 대응했다. 우리 수비병대와 일본군 사이에 몇 차례 불꽃튀는 교전이 벌어졌으나, 우리 수비병대는 신무기로 대항하는 일본의 군사력 한테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우리 수비병대가 가지고 있는 대포의 사정거리는
멀리 나가봐야 칠백여 미터 정도였지만,
일본이 무장한 대포는 그 보다 몇배 멀리 나갈 뿐만아니라
명중률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 피해는 당연한 우리 수비병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우리 수비병대는 35명이 죽었지만
일본군은 겨우 2명 정도밖에 죽지 않았다.
이런 피해를 당하고도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보상 요구 조차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이 더 피해 요구를 많이 해왔다.
그 이유로는 일본 군함 운요호에 게양되었던 일본기가
우리 수비병대의 대포에 의해 불타 없었졌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트집은 이러했다.
나라를 표시하는 국기를 달고 바다를 운항하는 모든 배들은
전쟁이나 약탈의 의사가 없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는데,
강화도 수비병대는 그것을 무시하고 포격을 했고,
더군다나 나라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일본기를
고의적으로 명중시켜 불태웠다는 주장이었다.
국기?
무엇이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우리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일본은 수비병대 35명의 목숨을 잃은 것 보다 더 분노에 차 있었다.
일본기를 대포로 쏘아서 불태운데 대한 응분의 사과와 보상이 없으면
정식으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로 간주하여
이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겠다니 참으로 답답할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우리 입장에서는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정당한 방어를 하다가 오히려 피해를 더 입은 우리측이
일본기 하나 잘 못 건드려 낭패를 당하고 말았으니
이 보다 큰 망신이 어디있겠는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일본이 요구하는 보상과 함께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수호조약을 맺게 되었고,
국기의 필요성을 수모와 함께 느끼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