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6. 헤르만 헷세(Hermann Hesse, 1877~1962)-크놀프
[ .....나는 밤에 하늘로 올리는 불꽃을 보는 것처럼
이보다 아름다운 것을 알지 못하네.
캄캄한 밤에 공중으로 올라가는 초록색의 불꽃은
가장 아름다와질 무렵에 작은 선을 그리며 꺼져 버리지.
그래서 그것을 보고 있으면 기쁨과 함께 불안을 느낀다네.
기쁨과 불안은 서로 붙어다니며
그것이 순간적일수록 아름답다네. 그렇지 않나?]
[ .....사람은 각각 영혼을 갖고 있다네.
다른 사람의 영혼과 혼돈될 수 는 없는 것이지. 두사람은 서로
같이 걸어갈 수 있고 같이 말할 수도 있고 또 같이 앉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두 영혼은 꽃과 같아서 각각 한 곳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이지.
그래서 가까이 하려면 뿌리를 없애야 하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꽃은 자기의 향기나 씨를 보내서서로 교접할 수 있으나,
씨가 적당한 곳에 가게 하는 것은 바람이라네.
바람은 자기 좋은 데로
마음대로 왔다갔다 할 수 있으니 말이야....]
크눌프....그에게는 이렇다 할 전과도 없었거 절도를 하거나 구걸을 한 일도 없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좋은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마치 귀여운 고양이기 가족의 일원으로 하는 일 없이 지내듯이 사람들은 그를 관용했다. 마치 고양이가 부지런하나 어렵게 지내는 사람들 틈에 끼어 아무 걱정없이 우아하고 점잖게 무위도식하는 신사처럼 그도 그렇게 지냈던 것이다.
제목 그대로 '크놀프'가 나오는 소설이다. 이런 식으로 주인공을 제목으로 차용한 소설은 '테스', '보바리 부인', 카라마조프 형제들', '데미안'처럼 인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크놀프' 역시 주인공 '크놀프'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고독한 방랑자. 이 말 이상으로 크놀프에게 어울리는 닉네임이 없다. 그의 인생은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끊임 없이 방황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무언가에 대한 끊임 없는 동경과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인생의 허무에 대해 좌절하고 견디기 힘든 권태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방황이다.
소설은 세 가지 단편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단편인 '초봄'은 크놀프가 병에서 막 회복한 후 나약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오랜 친구인 실로테르베크 집에서 머무는 이야기를 담았다. 두 번째 단편은 첫 번째와 세 번째 단편과는 달리 1인칭 관찰자인 '나'를 시제로 서술된다. '나'와 크놀프의 대화가 주요 내용이다. 세 번째는 크놀프가 오랜 방황에 지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죽게 되는 장면을 묘사한다.
헤세가 그리고자 했던 크놀프는 고독하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끊임 없이 되묻는 사람이다. 즉, 수행자다. 하지만 히말리야의 은둔자나 수도원의 수녀같은 수행자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는 사교계의 예의에 정통하며 유머 감각도 뛰어나고 한 번 만난 여성을 즉석에서 꼬실 수 있을 만큼 바랑둥이 기질도 다분하다. 크놀프에 대한 이런 인물 설정은 헤세의 다른 작품 '지와 사랑'에서 '나르치스'나 '수레바퀴 아래서'의 '헤르만 하일러'와 비슷하다.
소설이 작가의 체험을 반영한다고 할 때 '크놀프' 역시 헤세의 유년기 방황을 담은 작품으로 봐도 무방하다. 퇴학과 입학의 반복, 자살 미수 등 그의 폭풍 같았던 유년기 고뇌를 '크놀프'에서 엿보자면.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할 지라도 나는 그들에게 있어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이 되는 것이지. - 크놀프
결국 사람은 제나름의 세계를 지니고 있을 뿐이네. 결코 다른 사람과 공통의 것을 지닐 수 없는 것일세. - 크놀프
헤세 자신이 유년기 어려운 시험을 뚫고 신학교에 입학했듯, '크놀프' 역시 모범생은 아니더라도 훌륭한 학생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한결같이 크놀프가 방랑벽에 휘둘리지 않았다면 훌륭한 목사나 판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세 번째 단편인 '종말'에서 크놀프의 친구 샤이플래는 크놀프에게 왜 몸을 망쳤냐고 한탄한다. 판사가 되어서 돈을 벌고 안락한 가정을 가졌으면 좋았지 않겠냐고 말이다. 그에 대해 '크놀프'는 문학적인, 지극히 문학적인 답을 내 놓는다.
이제 알게 될 걸세, 샤이플레. 인자하신 하느님은, 아마 너는 왜 지방법원 판사가 되지 하고 묻지는 않을 걸세. 아마 어린애 같은 녀석 또 왔구나 하고 말씀하시겠지. - 크놀프
문학적이기에, 종교적이기에, 철학적이기에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깊은 구절이다. 크놀프는 젊은 시절 무절제한 생활과 방랑 때문에 몸을 망쳤지만 그의 방황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그는 지난 생애에 대해 미련을 가지고 신에게 질문한다. 왜 나는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었냐고 말이다. 신의 대답은 이렇다.
나는 지금의 그대를 달리 만들 수 없었다. 나의 이름으로 그대는 방황하였고 그대는 정주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자유에로의 향수를 불러 일으켜 주었다. 나의 이름으로 그대는 어리석은 일을 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대 속에 있던 내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고 또한 사랑을 받는 것에 불과하다 말이다. 그대는 나의 아들이요, 나의 동생이며 나의 분신이었다. 그래서 그대가 맛보고 겪은 모든 괴로움은 나도 똑같이 체험하지 않은 것이 없다. - 신
그리고 크놀프는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소설의 끝에서 신이 크놀프에게 말했듯 '크놀프'는 정주하는 사람들에게 자유에로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다. 돈과 가족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발 닿는 곳에서 내면 속 깊이 침잠하려는 '크놀프'의 인물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마 '자유'를 만끽하려는 현대인에게 분명 매력적인 인물 임에 틀림 없다. 특히 주변 사람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방황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점이 멋지다.
'크놀프'에게 돈이 무엇이냐. 권력이 무엇이냐. 가족이 무엇이냐.
다 부질없는 허상일 뿐이다.
크놀프의 방황은 지저분하고 불쌍하지 않다. 오히려 그의 방황은 아름답고 고고했다. 그가 비록 젊은 나이에 요절했을 지라도 그는 이미 죽음 이전에 충분히 성숙한 인간이었다. 인생의 의미란 죽기 전에 충분히 성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프롬 선생의 격언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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