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을 보며 / 서정주
가난이야 한날 남루(濫樓)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 (芝闌)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물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려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무러러보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한 일이요
청태 (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