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타인의 글)

무등을 보며 / 서정주

목향 2020. 3. 7. 15:24



무등을 보며 / 서정주


가난이야 한날 남루(濫樓)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 (芝闌)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물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려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무러러보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한 일이요

청태 (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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