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4.6월22일.파란만장미스길의하루

목향 2009. 5. 1. 16:22

제목 : 2004.6월22일.파란만장미스길의하루

엄마가 아프시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모시기 위해
언니는 고향집으로 향했다.
내가 아픈 것보다 엄마가 아프시다는 것이 더 크고 심각한 문제였기에
나의 아픔은 뒤로하고 엄마를 걱정해야했다.

언니가 들어서지 않는 나의 집은 사막처럼 황량했다.
게다가 다리의 통증 때문에 30분 간격으로 눈을 뜨며
밤을 지내고 맞은 아침은 더욱 서글펐다.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야하지만, 오늘은 녹음 스케쥴이 갑자기 잡힌 날이라
일찍 집에서 나와야하기에 병원에 가는 것은 내일로 미뤄야했다.
MRI를 찍어봐야 겠다는데, 내게는 도통 여유시간이라는 게 주어지지 않는다.
아침에 먹을 약을 억지로 삼키고 무엇이라도 조금이나마 요기를 하기 위해
냉장고를 열고 한참을 서있었다.
먹고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도 간단하게 곡기를 채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단팥죽을 몇 숟가락 덜어
전자레인지에 데운 다음 꺼내 쟁반에 얹으려는 순간, 잘 못 디딘 아픈 다리의 통증에
'악!' 소리를 내며 몸을 숙였는데.......
그만 겨우 담아놓은 단팥죽 그릇을 건드려, 홀라당 엎어 버린 것이었다.
마루 바닥과 싱크대 위는 쏟아진 내용물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흐힝~~
그나마도 바빠 시간에 쫓기는데..... 서둘러 걸레질을 하며 어질러진 부엌을 치우는데,
다리는 아프지.... 겨우 마련한 먹을거리는 다 쏟아버렸지....
영화 속에서 굶주린 수용소의 유태인이 겨우 받은 스프를,
넘어지며 다 쏟아버린 장면을 떠올렸다.
'이와 비슷한 심정이겠지?'
먹는 것 하나에 이렇게 비참해지는 심정이라니.....
나는 내 스스로에게
'사소한 것에 치사해지지 마라'하며 그 상황을 개그 적으로 받아들였다.

다음 상황,
그렇다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바나나를 우유와 섞어 갈아
조금 마시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픈 다리를 끌며 겨우 재료 준비를 했는데.....
이번엔 '믹서'가 작동하질 않는다.
흐힝~~~~
이젠 눈물까지 찔끔 나올 만큼 서러워지려 했다.

"아, 이건 두 가지 다 먹지 말라는 의미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쵸콜렛 한 알을 환약처럼 씹어 먹으며 집을 나섰다.
최소한의 칼로리 보충을 위해서다.
흐힝~~ 남들은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겠지? 생각하니 더욱 서럽다.

집 근처 골목을 지나 대로로 나오자마자, '탁'하고 무엇인가
자동차 앞 유리창을 향해 날아왔다.
반사신경에는 이상이 없던지 저절로 순간 눈을 감았다 떴다.
앞차의 바퀴를 통해 튕겨진 자그만 돌멩이였다.
유리가 깨지거나 금이 가진 않았지만
"아... 오늘은 무언가 많이 조심하고 지내야 할 날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정지선도 잘 지켜 섰고, 속도도 잘 지켰고 신호도 잘 지켰고 약속시간도 잘 지켰다.
조심 또 조심, 말 한마디도 조심했다.
아픈 내색도 하지 않았다.
방송도 잘 마쳤고 하루가 무난히 마무리되는 것 같아 안심했고
방송팀과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마침 내리던 비도 그쳐 있었다.
"수고했어~~ 내일 봐~~ 안녕~~"
주변의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동차 문을 열기 위해 발을 디딘 곳은, 비가 흥건하게 고인 물웅덩이였다.
흐힝~~  
하필 아픈 쪽의 다리로.....
나는 완전히 물에 빠져버린 발과 젖은 샌들, 무겁게 느껴지는 젖은 청바지를 닦고 있다.

현관부터 시작해 내가 밟고 지나 간 자리마다 빗물이 뚝뚝 떨어져 있다.
아침부터 시작한 걸레질이 밤까지 이어진 파란만장한 나의 하루였다.
후후후.......
내일은 꼭 병원에 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