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

한국수필 작가회 대표 선집 / ‘홑’과 ‘겹’ 사이

목향 2025. 6. 1. 15:06
새 책이 나왔다. 한국수필 작가회 대표 집 (38) 이다

본인의 작품도 게재되었기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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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표지>

                                     P 58에  본인의 글이 수록되어있다

계곡 옆 작은 학교   

김종선

 쌍곡 계곡에 다녀왔다.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며, 정말 산 좋고 물 맑은 곳이다. 평상시 약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을 여름 성수기라 무려 그 배의 시간을 들여 목적지에 닿았다. 약 4km 전방부터 양쪽 가장자리에 차가 빼곡 들어차 있는 데다 어쩌다 대형 버스 한 대 마주 치면 정말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다. 중도 포기할까도 했지만, 차를 되돌리기도 쉽지 않고 벼르고 벼르다 모처럼 나선 길인데 그러기엔 아쉬움도 너무 컸다.

뒤를 돌아본다. 젊은 시절, 나는 이 계곡 바로 옆에 있는 쌍곡분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그러기에 바로 먼 추억의 한 장소를 찾은 셈이다. 당시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심신의 피로가 너무 커 어디론가 의 탈출을 꿈꾸고 있었는데 바로 그 탈출구로 이곳을 택했었다.

혹자는 벽지니까, 옮기기 쉬운 줄 알겠지만, 그때나 이때나 승진을 꿈꾸는 사람이면 벽지 근무의 가산점을 부여받기에 승진과는 거리가 먼 나는 꽤 어려움도 있었지만, 윗분의 배려 로 이곳에서 일 할 수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감사하고 그때의 선택은 참 잘한 일 같다. 이곳에서의 2년 동안 어느 정도 삶의 권태와 찌꺼기를 많이 걸러냈기에 여러 곳의 임지 중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당시 이 미니 학교엔 교사 3명, 전교생 20여 명, 2개 학년씩 맡아 복식 수업을 했었다. 혹 자는 아이들 숫자가 적으니 수월할 것 같지만, 그건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일례를 들 면 도시 학교 입학생은 거의 문자 해득을 가정에서 미리 하게 되니 기초학습을 다지기만 하 면 되지만 이곳의 아이들은 생판 백지상태다. 어쩌다 두 사람이 이해 못 하면 이건 50%가 지진아다. 많은 수에서 몇 빠지면 그냥 넘어 갈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선 안 된다.

또한, 수업시간 내내 이리저리 오가며 개인 수업으로 진행하자니 얼마나 힘들었던지, 때론 너무 많은 말을 해 턱이 아파 입이 마음대로 움직여지 지 않을 때도 허다했다. 이렇게 학습지도의 어려움 때문에 힘도 들었지만, 아이들은 너무나 순진하고 귀여웠다. 새봄이 찾아와 지천으로 피어나는 풀꽃들은 으레 등굣길 아이들의 손에 한 다발씩 들려있었고 가을이면 알밤 한 움큼씩 나도 모르는 사이 책상 위에 놓였다.

추석, 설날 같은 명절을 아이들은 손을 꼽으며 기다린다. 생활이 어렵다 보니 가족 중 누 군가는 대처에 나가 돈을 벌게 되고, 명절 땐 누구나 선물 꾸러미를 들고 정다운 고향 집을 찾기 때문이다.

명절을 지나 등교하는 날엔 아이들이 새 옷으로 치장하고 자랑하고 싶어 안 달이다. 그 까만 눈동자, 순진무구한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수업이 끝나면 본교와 달리 잡다한 업무는 크게 없어 아이들이 돌아간 후의 시간은 거의 내 시간으로 자유로웠기에 바로 그것이 벽지학교의 매력이기도 하다.

이렇듯 한가한 시간이 주어지면 바로 교사 옆, 몇 미터 아래 계곡의 널찍한 바윗돌에 앉아 끝없이 이어지는 그 맑 은 물줄기에 멍 때리고 병풍처럼 둘러친 겹겹산들이 계절의 새 옷을 갈아입는 그 경이로움 에 감동하며 깊은 상념에 젖기도 했다. 운동장 돌담사이론 다람쥐들의 숨바꼭질이 한창이고 처마 밑 전깃줄엔 가끔 뻐꾸기가 찾아 와 울었다.

이렇듯 순수한 공간에서 자연과의 교감을 이루며 어느 정도 마음의 위안도 받고 안정도 찾았지만, 왜 그런지 그 시절은 늘 상 외롭기도 했었다. 교실 창문을 열면 저 산 모롱이까지 이어진 비포장도로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 길로 누군가 꼭 나를 찾아올 것 같은 막 연한 기다림에 가끔 눈길을 주기도 했지.

휘 ~ 둘러본다. 세월도 많이 흘렀지만 참 많이도 변해있다.

당시엔 적막강산이요. 그저 새 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색하고, 책 읽고, 음악 듣고, 때론 알밤 줍고, 나 물 뜯던 곳이 먼 길 돌아와 지금에 서니, 여기저기 보이는 건 펜션이고 사람들은 시끌벅적 그냥 들끓는다. 너도나도 가지고 있는 승용차, 당시엔 쉽게 구경할 수도 없었으니 격세지감 이라고나 할까, 아담하고 쾌적했던 분위기는 저 멀리 사라지고 이전에 폐교된 듯 학습장으 로서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잡풀이 무성한 그 작은 운동장엔 몇 개의 텐트가 쳐져 있다. 간판은 “ 충북 교직원 휴양소”란 팻말로 바뀌었다.

오랜만에 나그네 되어 찾아온 나, 나이 들면 추억 속에 산다고 했든가!  얼핏 헤아려보니 벌써 그 아이들이 불혹을 넘겼을 것 같다. 있을 때 잘하란 말이 있듯이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던 아이들에게 좀 더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주지 못한 것이 때론 후회 스럽기도 하다.

모처럼 추억의 장을 찾아와 냇물에 발도 담그지 않은 채, 그냥 추억 속을 꿈속처럼 헤매다 어느새 석양을 안고 되돌아간다. 이곳에 올 때는 어른으로 성장한 단 한 사람의 정다운 얼 굴이라도 만나 투박한 손을 맞잡고 그들의 지금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또 다음을 무언 으로 기약하고 발길을 돌렸다.

무언가 풀어내지 못한 아쉬움을 잔뜩 안은 채, 얘들아, 행복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