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4. 11. 4. 식사

목향 2009. 5. 28. 13:53

제목 : 2004. 11. 4. 식사

밥 먹는 일, 식사라고 한다.
그저 존칭어라는 수준을 떠나 내게는
진짜 밥 먹는 '일', 노동이 되었다.

언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내게 영양식을 먹이려
잣죽, 깨죽, 야채죽, 굴죽......
이름도 화려한 죽을 끓여내고 반찬도 만들지만
내가 그 음식들을 거부하니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만 가득할 뿐이다.

만약 속사정을 모르는 남들이 본다면
흰 쌀죽, 그것도 미음처럼 아주 묽게 쑨 죽 반공기에
김치볶음 몇 조각, 그리고 쌈장과 매운 풋고추가 놓인 식단때문에
혹여 나의 언니가 무성의한 식탁을 차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실은,
속이 메스껍고 헛구역질을 계속 해대는 나는
차라리 아무런 양념이 되지않은 흰 죽이 차라리 낫고
매운 고추를 한입 베어 먹는 것이
메슥거리는 속을 달래주기에, 내가 찾는 것이었다.

방송을 마치고 돌아올 시간에 맞춰
죽을 끓이고 김치를 볶아내
내 앞에 조그만 쟁반을 내놓은 언니에게 오늘은 그만 투정을 부리고말았다.

김치볶음 한조각 맛을 보고
더 이상 건드리지 않자, 언니가 물었다.
"왜, 맛이 이상해?"
"어.... 아니..... 맛있어....그냥... 좀, 마늘 냄새가 싫어서......"
내가 느리게 말을하자, 이내 언니는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너 마늘 참 좋아했잖아... 난 너 더 맛있게 먹으라고 한건데... 어쩌니..."
"아니야, 괜찮아.... 내 입맛이 이상해 진걸 뭐....
왜 이젠 마늘 맛이 이렇게 역겹지?
무슨 입덧하는 임산부도 아니구... 이거 원...."

내 앞에 앉아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언니를 보면서도
나는 그저 한 숟가락 죽을 뜨고 쟁반을 밀어내고 말았다.

진통제의 약기운이 떨어져 너무나도 아팠다.
그 통증을 느끼며 무언가를 먹는 일은 어려웠다.
하지만 무엇이든, 진통제를 먹고 조금이라도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먹어야만 했다.
그러나 먹을 수 없다.
고통이 밀려오는데......
너무나 힘겨워서 눈물이 나오려 하는데....
자신이 잘못한 음식때문에 그런 줄로 알고 미안해하는 언니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마침 집에 없는,
기름 발라 굽지 않은, 맨 김이 먹고싶다는 핑계를 대고
언니를 깊은 밤 집 아래층 편의점으로 내려보내고
아주 아주 큰 소리로 울음을 울기 시작했다.

지난친 통증은 이렇게 인간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아이처럼 울게 만들었다.
눈물 콧물 얼굴에 범벅을 하고 울고 있는데
자박 자박 돌아오는 언니의 발소리가 들렸다.

얼른 휴지로 얼굴을 닦고
아무 일 없던 듯, 휠체어를 돌려 현관 쪽으로 향하며 언니를 맞았다.
"김 샀어?"

언니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새로 사온 김 몇장을 꺼내 굽기 시작했다.
대답없는 언니를 보고 화가났나 싶었다.
얼마가 지난 후 언니가 말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너 우는 소리가 엘리베이터 앞까지 다 들리더라 얘.."
"들었어? 에이.. 들켰네, 히힛..."

언니는 마음이 아팠던 게다.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던 게다.

덕분에
기름 바르지 않고 구운 김에 밥 조금, 생김치 한조각 얹어
서너개를 먹었다.
그리고 약을 밥보다 더 많이 먹었다.

이제 약기운이 서서히 돌아 미쳐버릴 듯한 통증은 어느정도 사라졌지만
이런 평화는 2시간 후면 깨지게 되어있다.
나는 다시 통증때문에 신음할 것이고
다시 약을 먹기 위해서는 과일 한 조각이라도 먹어야 한다.
그것은 매일 밤새 계속되는 일과다.

이제는 간기능과 신장기능에도 이상을 가져와
얼굴이 자꾸 붓는다.
그런 나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얼굴이 좋아졌다"고 했다.
늘 웃고 있는 나를 보고
속 모르는 사람들은 아픔을 과장되게하여 꾀병을 부리는 것 아니냐고도 했다.

내게 있어 무언가를 먹는 일은 '식사'
즉, 일이며 괴로운 노동이 되고 말았다.

더불어 언니도 나와 같이 토끼 잠을 잔다.
나는 자꾸 자꾸 미안한 생각만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