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타인의 글)

서정범 추모특집/서정범의 문학세계 / 문학평론가 :최원현

목향 2009. 9. 28. 19:11

수필과 비평>서정범 추모특집/서정범의 문학세계

 

시대의 아픔까지 문학의 가슴으로 품다 가신 어른

 

최원현/수필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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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이며 원로 국어학자요 무속연구가인 서정범 경희대 명예교수가 2009년 7월 14일 83세로 우리의 곁을 떠나셨다. 학자이기 전에 한국 수필문학이 이만큼 위치를 확보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수고를 해 오신 분이다. 월당 조경희 선생과 한국수필가협회를 창립하여 협회 기관지인 <한국수필>지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한국수필 문단의 위상을 강화해 온 분이다. 그는 경희대 국문과 교수로 평생 학생들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중앙일보와 미도파 문화센터 및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에 수필강좌를 개설하여 수많은 수필가를 배출 시켰다. 또한 계간 <수필춘추>와 <문예비전> 등에도 관여하며 수필문학을 위한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서정범교수는 1926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대학원에서 석ㆍ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희대 문리과대학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어원학회 초대회장, 한국수필가협회 수석부이사장. 어문연구회 연구이사. 경희대 명예교수였으며 제18회 한국문학상(1981)과 제9회 펜문학상(1993) 그리고 수필문학상 대상(2000) 등을 수상 했다.

서정범 교수는 1958년《자유문학》에 평론 <은어(隱語)와 문학>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1960년《현대문학》에 <샤머니즘에서 본 한국문학>을 발표하는 등 한국적인 정서와 샤머니즘의 세계를 추구하는 글쓰기를 해왔다. 1966년부터 수필을 발표 <병상기(病床記)>를 비롯해 <미리내> 등 동심(童心)의 세계를 추구하는 경향의 수필을 다수 발표했다.

 

수필집으로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74)를 시작으로 ≪겨울 무지개≫(’77), ≪무녀의 사랑 이야기≫(’79), ≪그 생명의 고향≫(’81), ≪사랑과 죽음의 마술사≫(’82), ≪영계의 사랑과 그 빛≫(’85), ≪품봐, 품봐≫(’92) 등 그의 수필집은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특히 첫 수필집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는 20판을 찍는 등 수필의 저변확대 및 수필문학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공헌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뿐 아니라 ≪한국 특수어 연구≫(’59), ≪음운의 국어사적 연구≫(’82), ≪우리말의 뿌리≫(’89), ≪한국에서 건너간 일본의 신과 언어≫(’94) 등 언어학자로서의 전문적 저작과 40년 동안 3천여 명의 무당과 박수를 만난 체험적 저작들인 ≪무녀별곡≫ 시리즈 및 1985년부터 출간된 학원, 어원, 수수께끼, 이바구, 가라사대, 허허, 너스레, 우스개, 익살, 너덜, 철렁, 억억, 거덜,빼빼별곡 등 별곡시리즈는 사회학적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들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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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범의 수필들은 무엇보다 재미가 있다. 독자를 끝까지 눈을 떼지 못 하게 하여 결미에 가선 ‘아!’ 하고 탄성을 터트리게 한다. 그야말로 치밀한 구성으로 독자를 의도적으로 작품 속에 빠지게 한다. 그러면서 특유의 지식을 작품 속에 깔고 독자로 하여금 공유토록 한다. 그래서 원형갑은 서정범론에서 ‘서정범 수필의 특징은 독특한 암시법이다. 마지막 문장이 마침표로 끝난 후에도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짙은 안개 속에서처럼 우리의 생각을 혼돈 속으로 밀어 넣으며 긴 여운을 남긴다.’고 했다.

또한 소재와 주제들이 적나라하게 원시의 나성裸性 그대로 독자 앞에 선다. 그래서 그의 수필들은 소박하다. 그런데 그것이 또 독자를 매료시키는 마력을 갖게 한다. 추리소설처럼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그렇지만 독자는 그의 ‘계획된 음모’(원형갑)에 의해 작품 속에 빠져들지만 그런 음모의 낌새나 냄새는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한다. 결국 수필 한 편을 다 읽은 후에서야 비로소 한숨과 함께 아 그랬었구나 하고 그 계획된 음모에서 풀려나는 것이 바로 서정범 수필이다.

 

서정범 수필의 또 다른 매력은 간결 명료하고 정확한 문장 표현과 속도감을 느끼게 하는 문장의 흐름이다. 아주 쉽고 평이한 문장으로 풀어 나가기 때문에 독자는 아무런 긴장감을 느끼지 않는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전개는 경쾌하고 긴장감이 돌게 함축적이다.

거기다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글감으로 잡는다. 그의 이야기들이 흔히 들을 수 없는 무녀들의 신비체험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의 수필 구성은 소설의 재미와 긴박감을 넘는 재미를 추구한다. 그 좋은 예가 <놓친 잉어>이다. 이 수필은 네 개의 에피소드를 나란히 펼쳐놓고 있다.

 

① 임진강 상류의 잉어 모양으로 생긴 바위에 얽혀 있는 두 사랑하는 남녀의 애달픈 전설.

② 이북에서 남으로 넘어올 때 훗날까지 오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던 여 제자와 헤어지던 이야기.

③ 어느 여름 휴전선을 방문하여 본 철책선을 넘나드는 짐승들의 이야기.

④ 유 교수와 임진강에서 낚시질을 하다 잉어를 놓친 이야기.

이 네 개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작가는 아무런 설명도 않으면서 독립된 이야기를 통해 독자가 마음껏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도록 맡기고 있다. 독자는 처음엔 좀 당황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그것들이 인간의 헤어짐과 그리움이라는 보편적 정서와 주제를 담고 있다는 것을 쉽게 깨닫게 된다. 한 주제에 상이한 여러 개의 이야기를 묶는 중첩구조의 수필이다.

 

서정범은 <두견새> <미리내> <나비 이야기> <울릉도> <노랑나비> 등 다섯 편을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추천한 적이 있다.(최원현의 ‘문학에게 길을 묻다’ 서정범 편) <두견새>는 고황산에서 만난 할머니와 진달래술 이야기고, <미리내>는 은하라는 소녀와의 유년기 첫사랑 이야기다. <나비 이야기>는 죽은 열대어가 나비가 되었다는 이야기고, <울릉도>는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기행수필이다. <노랑나비>는 북에 남으신 어머니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어 돌아가신 것으로 여기면서도, 상복조차 입지 못한 불효스러움이 늘 마음에 걸려 있는 것이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그래서 어머니가 계실 거라고 믿는 북두칠성과 가까운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 북쪽 사하인 야쿠트를 찾게 되었을 때 밤 12시를 기해 상복을 입고 촛불을 켜고 정화수 앞에 꿇어앉아 한 많고 아프고 쓰라린 어머니의 사랑을 음미하는 의식을 치렀더니 어머니가 칠성에서 보내셨는지 노랑나비 한 마리가 손에 앉았다는 내용이다. 북에 남겨져 생사조차 알 수 없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자식으로서의 안타까움은 그의 많은 수필 속에서 가슴을 아프게 한다. 서정범 수필은 그래서 읽고 나면 가슴이 더 아리다. 아련한 그리움이 일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꼭이 슬픈 이야기라기보다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면서 서정범 수필의 특별함을 맛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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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범의 수필들이 무속과 관련한 것이 많은 것은 그가 무속에 깊은 관심을 가져서이기도 하겠지만 그 안에 무기(巫氣)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각은 늘 그쪽으로 향하기 마련이고 또 그의 마음 가득 그 기운이 차 있으니 자연 모든 시각 내지 사고(思考)가 그쪽으로 열려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고는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문학을 이룬다.

그의 수필 <모나리자의 콧수염>에선 24-7세의 피렌체 부호의 부인을 그린 것이라는 모나리자의 미소가 남성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나리자를 그리는데 무려 4년이 걸렸어도 그것도 미완성으로 끝났는데 그 그림을 그릴 땐 모나리자가 좋아하는 노래와 연주를 들려주어 오묘한 미소를 짓게 했다고 한다. 명성 높은 천재 화가와 모델, 모델과 화가 사이엔 그림을 그린다는 그 이상의 정서와 교류가 있었고 그런 속에서 싹트고 자란 연모의 정은 남성인 레오나르도의 미소를 닮게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서정범의 수필은 비과학적인 것 같은 것도 과학적인 것 이상으로 신뢰를 갖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울타리에서만 우는 매미>에선 아내가 수술 전날 4층 옥상에 채분을 만든다. 수술도 잘 되었고 꽃과 채소들도 잘 자랐다. 그런데 그 채분 주위로 참새와 까치가 날아들고 나비까지 찾아온다. 그뿐 아니라 울타리로 심은 사철나무에선 매미까지 운다. 서정범은 매미의 다섯 가지 덕을 내세우면서 ‘아내는 올해 채분을 이루어 매미를 초대 했으니 매미가 허물을 벗고 재생하듯 두 번째 수술에선 모든 아픈 허물을 벗고 건강을 되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쩌면 그런 뜻에서 매미가 와서 울어주었는지도 모른다’고 맺음한다. 말하자면 매미를 통하여 아내도 아픈 육신을 벗어버리고 건강한 새 몸으로 거듭나길 소망하는 것이다.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는 그 또한 잠재된 무기(巫氣)의 표출이다.

<바이칼호의 겨울 나비>를 보면 그의 무기(巫氣)는 더욱 힘을 얻는다. 부모님의 제사를 북두칠성 아래서 지내는 것도 자식으로서 뜻이 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70세가 되는 해 바이칼 호를 찾는다. 제사에 쓸 정화수는 어머니의 생가인 괴산에서 떠오고 서울서는 술과 포를 마련하고 바이칼 호에서 유명한 오무리라는 생선과 사과 7개를 사서 영하 43도의 하늘에 닿아있는 눈 덮인 평원에서 정화수를 사발에 따르고 술을 잔에 따라 절을 하고 무릎을 꿇는다.

그는 북두칠성 일곱 개의 별 중 세 번째의 별에서 어머니의 영상을 본다. 그리고 온천에서는 태아의 자세로 있어보며 제사와 온천욕을 통해 태아 때의 모정을 느낀다. 그는 고운 눈꽃 사이로 어머니의 영상도 본다. 눈꽃은 수천수만의 나비가 되어 하늘을 뒤덮으며 난다. 어머니는 자식의 가슴에 살며 그 사랑을 흰 나비 겨울 나비로 날게 한다. 그렇게 서정범 수필은 독자가 마치 그의 최면에 빠진 듯 작품에 홀리게 한다.

서정범 수필의 정수는 <미리내>다. <미리내>는 황순원의 <소나기> 같은 소설적 구성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내용은 피천득의 <인연>을 연상케 한다. 수필 <미리내>를 통해 그는 어린 날의 추억과 첫사랑의 그리움을 현실과 환상 속을 오가는 독특한 구성으로 소설의 맛과 흥미를 넘는 수필로 빚어낸다.

① 은하수와 미리내의 어원을 살펴본다 - 이것은 결미를 위한 암시적 기능도 갖는다.

② 그의 짝인 은하라는 소녀와의 추억을 상세하게 그려낸다.

③ 고향을 떠나는 날 새벽 간이역에서 은하로부터 눈깔사탕 한 봉지의 선물을 받는다.

④ 사춘기에 더욱 은하를 그린다.

⑤ 15년 만에 고향을 찾아 시집 가서 잘 살고 있다는 은하의 소식을 듣는다. 그러나 열 세 살의 아름다운 꿈과 별이 깨질 것 같아 그녀를 만나지 않는다.

⑥ 어느 해 새벽 딸이 태어난다. 딸의 이름을 미리내라 하기로 한다. 딸애의 눈동자로 밤하늘 가득 차 반짝거린다.

 

서정범은 ‘은하수와 미리내-은하와 미리내’라는 수미상관으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의 실현을 딸애를 통해 이뤄낸다. 이처럼 서정범의 수필에선 현세와 내세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환상의 세계처럼 그만의 수필 속 세계를 만들어 낸다.

 

4

서정범 수필문학은 ‘생명’이란 큰 나무를 세우고 그 속에 그만의 독특한 색깔과 향기와 모양의 가지들을 거느린다. 그래서 그의 어원 및 무속연구와 수필은 결국 하나로 합류하며 인간 생명의 문학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꽃이 그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 아름다운 색과 향기와 그 꽃 안에 꿀을 지니고 있듯이 사람도 아름다운 자기만의 색깔과 향기와 꿀을 지니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 아름다운 생명의 꽃> 중

로 그의 생각은 늘 이렇게 펼쳐진다. 서정범의 수필이 크게 문학성을 인정받고 있는 까닭도 여느 작가와 달리 그만의 그다운 풍부한 정보를 고도한 문학적 구성 원리로 독자에게 제공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수필은 단순구성이거나 산만구성인데 비하여 그의 수필 대부분이 복합구성으로 이뤄지고 한 편의 소설 같은 정교하고 치밀한 조직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데 그것도 평생을 학자로서 연구에 온 정열을 쏟은 그의 일상화된 삶의 영향일 것이다.

원형갑이 ‘서정범의 수필은 한국 수필문학에서 가장 고집이 있는 작품이다. 50여 년의 작품 활동 동안 오직 수필만을 고집해 오고 있기에 그렇다. 이렇듯 서정범은 수필을 쓰기 위해 문학을 한다. 그러므로 서정범의 수필에는 뼈가 있고 내용이 있다.’고 한 말이 바로 그렇다.

여하튼 서정범은 이 시대의 진정한 수필가요 한국문학사에서 수필이 문학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자리하도록 만든 공헌자이며, 사람은 자연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 일부일 뿐이며 고로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방향성을 제시해 준 수필가다.

분명 평생을 문학과 관련한 학문에 전력투구하다 가신 서정범 교수의 문학과 삶은 문학인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줄 것이다.

시대의 모습을 별곡시리즈로 엮어내고 풀어가던 그의 문학적 삶 뿐 아니라 연구와 창작의 아름다운 모델을 제시해 주고 가신 서정범 교수님은 분명 시대의 아픔까지 문학의 가슴으로 품다 가신 어른이다. 그래서 그를 보낸 마음은 벌써부터 그리움으로 가득 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