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 어느 날 큰애와 함께 / 광주에서
“엄마, 늦지 않게 다녀올게요.”
눈발이 펄펄 흩날리던 지난 1월 어느 날, 큰 애는 서울의 직장에 사표를 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정말 잘 선택한 일인가? 심사숙고로 결론을 냈는데도 자꾸만 미련이 남아 아쉬움에 마음 젖는다.
휴~~ 지난 일들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까만 바지에 노란 반코트, 베이지 색 머플러를 가볍게 두르고 보무도 당당하게 첫 출근하던 날의 모습, 애들 아빠도 대견한 듯 연방 웃음 띤 얼굴로 직접 인사를 시킨다면서 딸애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었다.
딸애의 헌칠한 뒷모습에서 부녀의 키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어렵다는 도내 1명 선발하는 그것도 처음 응시한 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임지로 첫 출근 하게 되니 가족 모두는 참 많이도 기뻐했었다.
단 나만 오랜 기간 같은 일을 해 온 선배로서 출근하는 딸애의 어께위로 연민 같은 애잔함이 엷게 스치긴 했지만 집안의 경사였다.
사실 대입시를 앞두고 사대(師大)로의 진학을 나만은 반대했었다. 더 힘든 일을 하게 되더라도 내가 걸어 온 길, 거울같이 알고 있는 그 현장에 자식까지 서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한 편으론 보람되고 소중한 자산일 수도 있겠지만, 눈빛만 보아도 어떤 연유로 얼마나 힘이 드는지 금방 알 수 있을 터인데 덩달아 같은 짐을 지고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그 애는 다행스럽게도 비교적 적응을 잘 해 능력을 인정받아 교육부 연구지정학교로 뽑혀가기도 하고 표창은 물론 “좋은 선생님” 선정 전교생 무기명 투표에서 당당1위로 뽑히는 등 한마디로 강물처럼 잘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좋은 평생 반려자를 만나 자식까지 두게 되었고 그토록 원하던 서울로의 전근도 이루어져 주말부부의 불편함 마저 없어지게 되니 오랜만에 저희 식구끼리 한 지붕 밑에서 오순도순 잘 살게 되나보다 기뻐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번엔 사위가 베이징 주재원으로 발령 받게 되니 더 이상은 떨어져 살 수는 없기에 휴직신청을 하게 되었고 멀리서 삶의 터를 잡아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휴직 6년, 법규상 더 이상은 할 수 없다는 거다.
아직도 젊고 한참 일할 나이인데 난관이었다. 현지에서 잘 적응하는 초등학생인 손자를 떼어놓고 딸애만 귀국할 수는 어려운 일, 결국 사표를 내게 된 것이다.
너무도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본다. 큰 애는 청주근교에 있는 국립 한국교원대를 나왔다. 집이 가깝지만 전원 기숙사 생활이 원칙이라 애들 아빠와 나는 자연스레 학교를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자주 만날 수 있으니 좋았고 또한 집에서 학교를 가기위해서는 청주의 상징 그 아름다운 강서 가로수 길을 지나게 되니 (전국 아름다운 길에 선정) 그 길을 오가면서 계절의 정취에 젖기도 하고 느긋한 마음의 여유도 있어 그 시간만은 참 행복하기까지 했었다.
어느 날이었다. 집에 온 다던 아이가 야심한 밤이 되어도 오지 않기에 기다리다 못해 직접 학교로 찾아 나섰다. 교정에 들어서니 이날따라 시끌벅적, 수많은 학생들이 사물장단에 맞추어 춤과 노래의 열기가 뜨거웠다. 젊음의 열정과 흥이 드넓은 교정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바로 이날이 개교 10주년 기념일이라고 했다.
어딘가에 있겠지, 그 많은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헤매다 기숙사 까지 둘러보았지만 허탕이었다. 어쩔 수없이 발길을 돌리는데 그 때 얼핏 섬광처럼 떠오른 생각 바로 도서관,
늘 앉아 있던 구석진 자리, 그 야심한 밤, 썰렁하고 휑한 도서관에 혼자 공부하고 있는 게 아닌가.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온 기를 모아 올인 했기에 직장을 잡은 것이다.
자식자랑은 팔불출이라 하기도 하고 보다 더 훨씬 높은 공부에 매진하는 이들도 많지만, 나는 그때도 더 이상의 큰 욕심은 없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해준 그 성의에 그냥 고마웠다. 초, 중, 고, 대를 지나면서 그 모범생이란 말이 듣기 싫다고 했고 전 학년 장학금으로 대학을 마쳤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공부해서 직장을 얻었는데 사표를 내야하다니, 아무리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 해도 아깝고 서운한 마음 헤아리기 어렵다. 그 한 자리를 얻기 위해 십 수 년을 고시에 매달리는 친구도 허다한데 힘들게 구한 일자리를 그만두다니, 먹고사는 문제만 보더라도 어디까지나 유동성이니 지금 밥은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안심할 단계도 아니고 경제성을 떠나 생각해 봐도 일을 할 나이에 일을 해야지. 배운 것을 돌려 줘야지.
마음을 굳혔다 해도 정작 사표를 내는 날이 박두하니 내 머리는 하루 종일 뒤숭숭했다.
그러면서 내심으론 사표를 쓰지 않고 그냥 돌아와 좀 더 생각해 보겠다는 답변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사대로의 진학이나 사표를 내는 일에 표면적으론 나만이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것 같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본인은 물론 가족 모두는 다 같이 아쉬움에 고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문제로 더 이상 갈등하고 싶지 않고 어차피 내려놓아야 할 짐이기에 빠른 결정을 서두르는 것 같았다. 또한 시댁 어른들의 완강한 종용에 거역할 수도 버틸 수도 없었다.
돌아와서 말한다.
“엄마, 교감선생님이 참 좋으신 분이야. 약 십 여일 말미를 줄 테니 좀 더 생각해 보래. 그리고 엄마, 하필이면 버스 내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3년째 임용고시준비를 위 해 1주 두 번 서울 학원에 드나든다는데 그 친구 얼굴이 너무 창백해 보여. 왜 그만두느냐고 자꾸 물어 봐. 사표 일곱 줄 쓰긴 했어도 나도 아쉬움이 너무 커.”
살면서 우리는 중요한 결단을 내릴 문제에 봉착 할 때 가 있다. 아니, 크든 작든 거의 모든 일은 날마다 계획하고 선택하며 실천하고 반성하며 살아간다. 잣대의 눈금이 한쪽으로 기울어짐은 후련한 답을 얻게 되지만, 양편의 무게가 수평일 때 고민에 쌓인다. 어쩌면 이 결론들은 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행, 불행을 좌우하는 분수령이 되기 때문이다.
일생에서 가장 무게를 두는 선택의 길은 ? 아무래도 진학, 일, 배우자등이 아닐까?
점(占)집의 해답이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 임을 잘 알면서도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결론짓기가 때론 너무나 벅차기에 기대고 싶은 심정이 아닐까.
“ 그래. 딸아, 오늘의 선택이 또 다른 더 좋은 광명의 길로 들어서는 소중한 출발선이 되기를 바란다. 돈의 양면처럼 어떤 경우에도 좋은 점이 있는가 하면 나쁜 점도 있기 마련이란다. 잃은 것만큼 얻는 것도 있게 되겠지. 네 가 비워준 한 자리가 또 다른 한 사람의 소중한 희망이고 보면 좋은 일 했다고 생각하려무나.”
이 말은 비단 내 딸에게만 주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다. 양자택일의 소중한 기로에서 나를 포함 모든 이들에게 던지고 싶은 말이다. 어차피 결론은 내야하고 심사숙고로 결정을 했다면 후회를 말고 발판으로 삼아 더 밝은 내일을 기약해야 한다고 억지로 라도 힘주어 말 하고 싶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또다시 뜨지 않는 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이렇게 자꾸, 자꾸 뇌까리고 있었다.
※ 위 글은 한국수필가협회 발행 < 한국수필 > 2011년 4월호에 게재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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