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화

[스크랩] Sound of Music길은정일기 中 .... 오드리 햅번 `로마의 휴일` 영화감상하기

목향 2011. 11. 8. 13:59

제목 : 2003. 5월 26일. Sound of Music

4년전 쯤, 내가 살던 아파트 근처에 그나마 유일하게 남아있던 비디오 대여점이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었다.

대부분의 비디오테입은 다른 가게로 넘겨지고
그리고도 남은 비디오테입들을 작품에 따라 천원에서 만원 수준으로
원하는 사람들에게 판매를 했었다.

그때 나도 몇편의 영화 테입을 구입했었다.
'로마의 휴일' 등 몇편의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들은 무척 비쌌었다.
그 작품들은 부르는 게 값이라며
그나마 이렇게 살 수 있는 게 행운이라고 단 한푼도 에누리없이 비싼값을 치르고
구입을 해뒀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를 비롯해 여러가지 인상깊게 봐왔던 영화테이프를
골라 사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여행중에 디즈니 만화영화 몇편을 사온 것까지 합치면
꽤 여러편의 비디오 영화를 아무때나 볼 수 있는 축복을 받은 셈이다.

그 중에서 때에 따라 기분을 바꿔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는 영화가 있다.
특히 몹시 우울할 때마다 나는 'Sound of Music' 을 본다.

하도 여러번 보아서 대사를 다 외울정도지만
그래도 언제나 내 마음을 밝게 만들어 주는 명약같은 영화다.
기타를 든 씩씩한 발걸음의 쥴리 앤드류스가 연기했던 '마리아'의 캐릭터는 우리 누구나 원하는
아름다운 여인과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고해할 줄 알고, 현명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맑은 새와 같은 노래를 부르는
그 여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삶을 긍정적으로 보고, 노래로 사랑을 이어가며 지혜롭게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여인.
조국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는 전시 상황에서
절대 조국을 버리고 독일군 지휘관으로 가야하는 명령을 따를 수 없다는
일심. 애국심.
권위적이며 까다롭게 비춰지던 '폰트랩'장군의 캐릭터 역시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군의 명령에 따를 수 없어 탈주를 계획하다가
음악회에 출연하게 되는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의 장면은
언제나 가슴이 울렁거리게 한다.
" ....... blossom of snow may you bloom and grow
bloom and grow forever~ Edelwiss- Edlwiss~ bress my HomeLand forever....."

에델바이스라는 노래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변절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리고
가족을 이끌고 알프스산을 통해 국경을 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알프스산의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과 인간의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이
조화를 이뤄, 더욱 빛을 발하게 한다고 느낀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땐,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본다.
날이 밝도록 몇번이고 보고 또 봐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더러는 디즈니 만화영화인 신데렐라도 보긴 하지만
사운드 오브 뮤직 만큼 감동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러면서.....
맑은 동요음반을 반드시 만들어야 되겠다는 의지를 다듬는다.
요즘 어린이나 아기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유행하는 대중가요 댄스뮤직, 힙합, 테크노가 아니다.
과외 공부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편안한 정서이며,
감성이라고 생각한다.
어릴적부터 짜여진 영재교육을 받고 적성과 상관없이 미술학원으로 피아노학원으로
태권도 도장으로 향하는 아이들이
그 시절에 맑은 어쿠스틱 악기의 동요를 듣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 공격적 성향과 이기적 심성을 가질 확률은 매우 높다.

나는 가끔, '길은정안티카페'라는 곳에서 허무맹랑한 비논리로 음해를 하고
끝없는 오해를 하고 욕설을 서슴없이 써내려가는 사람들의
어린시절을 알아보고 싶기도 하다.
분명히 안정적 이고 평화로우며 행복한 환경에서 자랐다면
함부로 인신공격을 하는 글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가진 인성이 불쌍하기까지 하다.
사회에 나와서는 안그런척, 착한 척, 평범한 모습을 보이다가
참았던 분노를 엉뚱한 곳에다 쏟아놓는 일을 하면서
누가 알까봐 두렵지 않을까?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될텐데......
그리고 하늘이 알고 있는데......

나는 그들을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이버상의 맹목적 테러는 근절되어야 하고
인터넷 실명제가 현실화 되기를 기대하고
사이버테러의 근절에 나도 한 걸음 앞장 설 각오를 하고 있다.

오늘도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았다.
정직함, 정의로움, 자기 반성, 그리고 고인 연못처럼 머무르지 않는 끝없는 정진에 대해 생각하고
쓸데없는 '고소'사건에 휘말려 작업이 중단되어 있는 음반 제작 작업을
성실히 할 수 있길 바라며
모든 일은 뜻대로 하소서..... 기도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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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휴일 /1953년 영화

주연  그레고리 펙 & 오드리 햅번

           


 

 

 

                        안젤리나 졸리 VS. 오드리 햅번
 



‘안젤리나 졸리’와 ‘오드리 햅번’.
아름다운 그녀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당 시대의 최고의 미녀? 전세계사람이 주목하는 유명인사?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녀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픈 위대한 봉사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주목 받는 인사가 아니라서, 돈이 없어서 봉사를 못하는 건 아닐 거에요.
미녀배우, 인기 많은 유명인, 돈 잘 버는 스타의 수식어를 다 빼고라도 한 명의 인간으로써
아름다운 봉사가로 살아가는 삶을 보면서 내 생활과 인생을 다시 계획해보는 건 어떨까요?

나이가 많다고요? 이제와 그렇게 살면 뭐하냐고요?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녀들도 방황하던 시기를 거쳐
뒤늦게야 ‘제2의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었거든요.


<세기의 여배우들의 ‘위대한 봉사가’로서의 삶 비교>

안젤리나 졸리 (1975~)

오드리 햅번 (1929~1993)

1막 졸리의 방황하던 어린 시절

1. 햅번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

2막 이 시대의 가장 섹시한 여배우 & 2번의 결혼생활

2. 당대 최고의 미모와 인기를 누린 여배우 & 2번의 결혼생활

3UN친선대사와 인생의 전환점

3. 유니세프대사로써의 제2의 인생

4막 지속적인 빈민구호에 대한 관심과 3명의

난민 입양

4. 나머지 인생을 봉사에 헌신하는 삶과 유명한 봉사자로써의 활동

5막 진실된 삶을 통해 남긴 속 깊은 말

5진실된 삶을 통해 남긴 명언



1막 - 그녀들의 불우했던 어린시절


‘안젤리나 졸리’의 방황하던 어린시절

#유명한 배우 부모님의 딸로 출생: 1975년 6월 4일,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명배우인 존 보이트와 배우 출신인 마셀리니 베르뜨랑의 사이에서 앤지(졸리의 애칭)가 출생했습니다.

#반항으로 인한 자해와 자살시도: 영화촬영의 바쁜 스케줄로 가정엔 소홀했던 아버지를 싫어했고, 자기자신 그대로가 아닌 영화배우 누구누구의 딸로 불려져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었으며, 여러 번의 자살시도와 약물중독,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며 자기파괴를 일삼았습니다. 최초의 자살 시도는 불과 13살 때 였다네요.

#외모콤플렉스와 정신병원: 자신이 쓸모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10대 시절에는 외모 콤플렉스가 심해 심리치료를 받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을 겪으며 혼란스러웠던 ‘오드리 햅번’의 어린시절
 
#부모님의 이혼과 2차 대전으로 인한 가난: 오드리 헵번은 1929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아일랜드 계 영국인 제임스 A.헵번 레스톤과 네덜란드의 유서 깊은 남작가문 출신의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2차대전이 일어난 후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의 고국 폴란드에서 지냈는데요. 이 시절 오드리 헵번은 나치점령 하에서 전쟁의 공포와 굶주림 등 온갖 고초를 겪었는데, 이 시절의 수난과 가난이 그녀로 하여금 훗날 어린이들의 가난 구호에 앞장서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2막 - 당대 최고의 미모와 인기를 가진 여배우 & 두 번의 결혼

이 시대 가장 섹시한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와 결혼의 실패

# 할리우드의 요부로 방황하다: 데뷔 초부터 양성애, 그녀만의 독특한 성적취향 그리고 마약문제 등의 복잡한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들어 내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나쁜 여자로 통했어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때 자괴감에 사로잡힌 불행한 여배우였다고 할 수 있죠.

#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미녀배우: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미인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습니다. 특히 섹시한 여성으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표심볼이 되어있는데요. 할리우드 대표배우로 3번의 골든 글로브 상과 2번의 영화배우협회상과 《툼 레이더》로 1번의 아카데미상을 받았어요.


# 2번의 결혼생활: Jonny Lee Mille, Billy Bob Thornton과 두 번의 결혼을 했었고, 졸리가 매덕스를 입양하자 이미 친자식들이 있었던 밥 손튼은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둘만의 애정도 식었기 때문인지, 이혼 후 홀로 매덕스를 키우죠.


로마의 휴일의 헤로인이자 당대 최고의 귀여운 여인, ‘오드리 햅번’

# 발레수업을 받다가 감독의 눈에 띄다.: 헵번은 19살 때 단신으로 런던으로 가서 발레리나 수업을 받다가 1950년 마리오 덴비 감독의 눈에 띄어 <낙원의 웃음>에 단역으로 데뷔했습니다. 큰 주목을 끌지 못하다가 프랑스에서 여성작가 꼴레트를 만나게 되죠.

# 데뷔한지 3년 만에 여우주연상 수상: 꼴레트는 자신의 작품 <지지>를 뉴욕에서 공연할 때 오드리 헵번에게 주연을 맡겼는데,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린 <지지>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연극 공연을 보았던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그녀를 <로마의 휴일>에 여주인공으로 캐스팅 하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은 청순하고 여린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1953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후 <마이 페어 레이디>로 사상 처음 개런티 백만 달러 스타가 되기도 하였어요.

# 오랫동안의 인기와 패션선두주자: 그녀는 12년 동안 15편의 영화에 등장하면서 비평가와 흥행가를 동시에 석권하여 인기가도를 달렸습니다. 특히 <로마의 휴일>에서 ‘그레고리펙’에 이끌려 미장원에 들러 짧게 깎은 '햅번스타일'의 숏컷트, <사브리나>에선 맘보 바지를 세계에 유행시켰죠. 그녀는 50년대, 60년대에 이른바 '헵번 스타일'로 미용과 패션의 상징이 되었으며 영국의 BBC가 뽑은 세계 최고의 미인에 등극하기도 했습니다.

# 2번의 결혼생활: 오드리 헵번은 두 번 결혼했는데, 1954년 영화배우 멜 파라와 결혼했으나 68년에 이혼하고, 2년뒤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 재혼했습니다.


3막 - 제 2의 인생 전환점, 그녀들의 봉사활동

‘안젤리나졸리’의 제2의 인생 전환점, UN친선대사와의 인연

# <툼레이더>를 통한 난민에 대한 관심:  앤지가 처음부터 자선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닙니다. 영화를 통해 부와 명성을 거머쥔 그는 여느 스타처럼 사치와 허영에 젖어 있었다고 해요. 그러다 그녀는 2001년 난민이 많은 캄보디아를 배경으로 한 <툼 레이더>라는 영화를 촬영하러 갔다가 지뢰에 손발이 잘린 난민들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와 현실의 부조화'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생기면서 유엔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적극성을 발휘했습니다.

# UN친선대사로써의 활동: 이후 그녀는 2001년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친선대사로 임명돼 아이티, 코소보, 레바논, 스리랑카, 수단 등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다니며 난민을 만나고 대중들에게 관심을 호소했습니다. 2001년 유엔친선대사로 임명돼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영화 홍보 전략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오드리 햅번’, 유니세프대사로써의 제2의 인생

# 영화배우의 은퇴와 유니세프대사: 그러나 스타로서의 삶의 허망함과 환멸감이 그녀를 새로운 사명의 길로 몰고 갔다고 합니다. 영화인으로서 은퇴를 결심한 1988년, 오드리 헵번은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대사가 되어 소말리아로 날아갑니다. 에티오피아, 수단, 방글라데시, 베트남 등을 방문하여 아이들을 돌보는 등 인도주의적인 구호 활동에 앞장섰어요. 기아와 질병, 그리고 폭염으로 고생하는 소말리아 아이들을 헵번은 마치 친 자식처럼 사랑해줬고 많은 아이들의 생명을 구원해냅니다.



4막 - 지속적인 빈민구호에 대한 관심과 봉사가로써의 삶

‘졸리’의 5년동안의 봉사하는 생활과 6명 아이들의 어머니

# 지속적인 빈민구호 활동: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졸리는 UNHCR의 ‘얼굴’로 자리 잡았고 졸리는 그동안 UNHCR 친선대사로 캄보디아와 인도, 시에라리온, 차드 등 20여 개국 오지를 돌며 난민을 만나고 구호품을 전달했습니다. 연간 서너 번꼴로 난민촌을 방문하는 셈인데요. 그는 UNHCR 홈페이지에 ‘졸리의 저널’이라는 글을 통해 비참한 난민 실상을 전 세계에 생생히 중계하고 있습니다.

# 아프리카 난민아 입양: 난민문제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가족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고 졸리는 어느새 여섯 명의 자식을 두고 있습니다. 그녀는 두 번째 남편 빌리 밥 손튼과 살면서 캄보디아 출생 아들 매독스를 입양했고, 그와 헤어진 뒤엔 에티오피아에서 딸 자하라를 데려왔어요. 세 번째 배우자 브래드 피트와는 2006년 여름 딸 실로 누벨 졸리 피트를 낳았고, 다음해 3월엔 베트남에서 남자아이 팍스를 입양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졸리는 쌍둥이 녹스 레온 졸리 피트와 비비안 마셸린 졸리 피트를 낳았구요. 그녀가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아래의 인터뷰 구절로도 알 수 있죠.

“<체인질링>이 개봉하는 내년 2월까지 활동하고 당분간 영화계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 나는 6명의 아이들의 엄마로서 매우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이들의 엄마의 역할을 해주고 싶다.” 
- 2009년 개봉작 ‘체인질링’ (Chanelling)의 홍보 차 가진 영국 BBC 방송과의 졸리의 인터뷰 中



# 기부하는 삶:
① 앤지는 매년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자신의 수입 중 1/3을 자선사업에 기부합니다.
② 미국 연방국세청이 조사한 서류에 따르면 2006년에만 모두 약 850만 달러(약 80억 원)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③ 2006년 만든 ‘졸리/피트재단’은 국경 없는 아이들을 위해 매년 전세계적으로 100만 달러를 기부하고 있습니다.
④ 2006년 6월 캄보디아의 숲을 보호하기 위해 독자적인 환경단체를 결성하고 130만달러를 지원했습니다.
870억 원짜리 초호화 요트를 구입하던 졸리는 이제 구두 굽을 세 번 바꿔 신을 정도로 검소해졌고 얼마 전에도 세계적인 시상식에 2만 원짜리 드레스를 입고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 봉사, 선행 할리우드배우의 대표아이콘이 되다:
① 2003년도에는 유엔기자협회에서 수여하는 '세계시민상'을 받았습니다.
② 2005년에는 미국유엔협회에서 수여하는 '세계인도주의자상'을 수상했습니다.
③ 2008년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목록에서 3위를 차지했습니다.
피플지는 ‘가장 아름다운 인물 100인’을 선정해 그 가운데 안젤리나 졸리를 1위로 꼽았다. 안젤리나 졸리는 지금까지 네 번 피플지 가장 아름다운 사람 리스트에 올랐지만 1위에 올라 표지를 장식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졸리와 하이티 섬에서 함께 구호 활동을 펼쳤던 뮤지션 와이클리프 진의 말을 인용해 “졸리는 아무 화장도 치장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외지에서 봉사할 때 가장 아름답다”고 전했다.



나머지 삶을 지속적인 봉사에 헌신한 아름다운 ’오드리 햅번’

# 병에 걸린 헵번: 헵번은 무려 5년동안 소말리아의 아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봉사했고 92년 몸의 이상을 발견해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병명은 결장암 말기. 11월 수술을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1993년 자택에서 63세로 아름다운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 영원히 그녀를 기리기 위한 선물: 한편 유엔과 민간단체 '세계평화를 향한 비전(Global Vision for Peace)'은 장기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인류애를 실천한 헵번을 기리기 위해, 2004년 2월에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제정했습니다. 2004년 제1회 수상자는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퇴치와 동물보호 및 환경보호에 앞장선 공로로 미국의 여배우 D.배리모어라고 합니다.


5막 - 진실된 생활을 하는 그녀들의 명언

‘안젤리나 졸리’가 남긴 명언

# “스타는 지구촌 문제를 공론화할 힘이 있다. 내가 영화에 출연해 대중의 관심을 많이 받을수록 더 많은 인도주의 프로그램을 후원할 수 있다.” 유명인사로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이 대단한 듯 해요!

# “14살 때 누군가가 저를 아시아나 아프리카 한가운데 떨어뜨려 놓았다면, 제가 얼마나 자기중심적 인 사람인지 깨달았을 거예요. 그곳에서는 고통, 죽음과의 진정한 싸움이 한창이었으니까요.” 자기가 얼마나 변화할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말인 것 같아요.

# “한밤중에 아이가 흘린 음식으로 몸이 범벅이 된 채 아이를 안고 살살 흔들며 재우는 제 모습은 지저분하고 지친 모습이지만, 전 그때의 제 모습이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또, 그녀는 입양 자녀 매덕스를 키우면서 엄마가 된 후 때로는 자신의 지저분하고 헝클어진 모습에서조차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심미안도 갖게 되었다고 해요.


‘오드리 햅번’의 명언

# "내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당신이 유니세프에서 하는 일이 정말로 뭐냐는 것이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육, 경제, 정치학, 종교, 전통과 문화의 전문가가 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나는 이 중 아무 것도 아니지만, 나는 어머니이다.


# 결장암으로 고통받던 헵번은 어느 날 아들을 불러 이런 말을 남깁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있으면 친절한 말을 하거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살피거라.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번 어린이에게 네 머리카락을 쓰다듬게 하거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야 하고,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며,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단다.

결코 누구도 버림받아서는 안 된단다. 기억해라, 애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사용하면 된단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 한 손은 네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란다. 명심하거라." 헵번이 죽기 한달 전, 크리스마스 이브날 아들에게 전한 유언입니다


‘어려운 가정환경, 세계가 주목하는 미모의 여배우,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삶.’
다른 듯 비슷한 삶을 사는 오드리 햅번과 안젤리나 졸리인 것 같습니다.
미모보다도 더욱 마음씨가 아름다운 그녀들의 삶을 닮고 싶습니다.

출처 : 끝까지 함께해요
글쓴이 : 금선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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