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단종대왕
권력은 본질적으로 비정(非情)하다. 그 핵심적인 까닭은 그것이 재력(財力)과 함께 가장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가치(價値)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소유한 사람은 당연히 그것을 강력하고 오랫동안 유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지만, 그것을 빼앗겼거나 노리는 사람은 그런 목적을 이루는데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가장 첨예하고 거친 충돌과 투쟁이 전개되는 국면은 권력의 공백기(空白期)이다. 그때 권력을 노리는 개인과 집단은 날 것 그대로의 욕망과 수단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조선의 제6대 국왕인 단종(端宗. 1441 ~1457. 재위 기간 1452 ~1455)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운명의 국왕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첨예한 권력 투쟁은 대부분 건국 초기에 빈발한다. 조선이 개창(開創)된 지 꼭 60년만에 11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 국왕은 권력의 공백(空白)이 빚어낸 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단종의 일생
1441년 ... 世宗 23년에 출생. 生母는 생산 후 3일만에 죽는다.
1450년 ... 9살의 나이에 世子로 책봉된다.
1452년 ... 文宗이 죽자 12세에 조선의 6대 王으로 즉위한다. 13세의 정순왕후와 결혼.
1455년 ... 6월11일, 수양대군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上王)이 된다.
1455년 ... 10월24일, 사약을 받고 죽는다. 17세.. 시체는 강물에 버려진다.
1516년 ... 中宗 11년, 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묘를 찾으라고 지시. 우선 봉분만 만든다.
1521년 ...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죽는다.
1541년 ... 중종 36년, 노산군(魯山君)의 묘를 찾는다. 몰래 암장(暗葬)되어 있었다.
1580년 ... 宣祖 13년, 노산군의 묘에 상석, 장명등(長命燈) 등을 세운다.
1698년 ... 숙종 24년, 노산군(魯山君)에서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그리고 단종(端宗)으로 추존
된다. 묘(墓)에서 장릉(莊陵)이 되었다.
1733년 ... 英祖 9년, 정자각(丁字閣)과 신도비(神道碑)를 세운다.
1791년 ... 正祖 15년, 우물을 파고 영천비(靈泉碑)를 내린다. 제단도 마련한다.
단종(端宗)은 1441년(세종 23년) 7월23일, 문종(文宗)과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휘는 홍위(弘暐)이다. 객관적 조건으로만 보면, 앙위 계승자로서 단종의 조건은 완벽하였다. 부왕(父王)인 문종(文宗)도 적장자(嫡長子)이었고, 자신도 적장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가장 비참한 운명의 국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왕위에 오르기까지 단종이 밟은 과정은 매우 순조로웠다. 1448년(세종 30) 4월 3일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었고 (그의 나이 7세), 2년 뒤에 아버지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즉시 왕세자가 되었다 (1450년 7월 20일). 운명의 변화는 문종이 즉위 2년만에 승하하면서 시작되었다. 1452년 5월 14일 문종이 39세의 나이로 붕어(崩御)하자 단종은 근정문(勤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왕통은 이었지만, 이때의 상황은 권력의 공백기로 급변할 수 있는 정황을 대부분 갖추고 있었다.
우선 국왕은 너무 어렸고,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중심으로 한 숙부(叔父)들은 인생에서 가장 정력적인 시점에 와 있었다. 이때 수양대군은 35세, 안평대군은 34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뛰어난 능력과 커다란 야심(野心)을 갖고 있었다. 신하들은 대부분 세종 대의 인물들이었다. 삼정승(三政丞)은 세종의 고명(誥命)을 받은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남지(南智)이었고, 그 아래 실무진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등으로 대부분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四) 출신이었다.
장릉 莊陵
이 곳 장릉(莊陵)은 다른 왕릉에 비하여 많이 다르다. 우선 왕릉은 한양 百里 안에 모시는 것이 관례이었지만 , 장릉은 지방에 모셔진 유일한 왕릉이다, 그리고 낮은 구릉에 모셔진 다른 왕릉에 비하여 아주 높은 곳에 모셔져 있으며, 대부분의 왕릉이 봉분,장자각, 참도, 홍살문이 一直線 上에 배치되었지만, 이 곳 장릉의 경우 신좌을향(辛坐乙向 .. 南西에서 北東向으로)으로 모셔졌고, 정자각(丁字閣)은 북쪽을 향하여 있어 정자각에서 陵의 옆구리를 향해 절을 할 수 밖에 없다.
장릉 (莊陵) ... 보물 제 1536호
계유정난의 발발과 폐위
단종의운명을 사실상 결정지은 사건인 계유정난(癸酉政亂)은 1453년 10월 10일에 일어났다.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반만이었다. 그것은 태종(太宗)이 일으킨 제1차, 2차 왕자의 난(王子의 亂)과 함께 조선 전기의 가장 대표적인 권력 투쟁이었다.
계유정난의 과정과 결과는 너무 잘 알려져 있다. 수양대군(首陽大君)과 한명회(韓明澮) 등은 황보인, 김종서 등 주요 대신들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격적으로 거사했고, 그들을 대부분 숙청하였다.
계유정난의 성공으로 수양대군은 실권을 장악하였다. 영의정부사 (領議政府事) 영집현전 경연 예문춘추관 서운관사 ( 領集賢殿 經筵 禮文春秋館 書雲觀事) 겸 판이병조사(兼 判吏兵曺事) 중외병마도통사 (中外兵馬都統使) ..라는 유례없이 길고 어마어마한 관직은 그러한 권력의 크기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계유정난의 가장 중요한 숙청 대상이었던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즉시 강화(江華)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1453년 10월 18일이었다. 1455년 6월 또 다른 위험 인물인 금성대군(錦城大君)도 유배되었다. 이로써 위협이 될만한 이눌은 거의 모두 제거되었다.
수양대군이 갖지 못한 유일하지만 결정적인 권위는 왕(王)이었다. 1455년 윤6월 11일 결국 수양대군은 단종의 선위(禪位 .. 왕이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를 받아들여 국왕으로 등극함으로써 그동안 갖지 못했던 명목상의 권위까지 모두 인수하였다. 정변(政變)의 성공부터 최종적 완성까지 1년 반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거린 이런 과정은 500여년 뒤 한국 현대사에서 일어났던 두 번의 군사쿠데타와 집권 과정의 어떤역사적 선례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로써 단종은 자신보다 24세나 많은 숙부의 상왕(上王)이되어 수강궁(壽康宮 .. 창경궁의 전신)으로 물러났다.
보물 제1536호 .. 端宗으로 추존(追尊)되고 후일 임금에게 보고하던 자료인 듯..
영월 지도 (寧越 地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