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5월 23일. 연예인에 대한 편견

목향 2009. 3. 21. 14:28

제목 : 2003. 5월 23일. 연예인에 대한 편견

어릴적부터 꿈 조차 꾸어보지 않았던 직업. 연예인이 된지 벌써 20년째다.
통기타를 치는 가수로 데뷔를 했고
이후 바로 방송 진행자로 발탁이 되어 수많은 인기 프로그램들을 진행해왔었다.

대중들은 인기연예인이 되면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얻고
편안하고 호화스러운 삶을 살 것이라고,
또는 문란한 생활을 할 것이라고 대단한 오해를 하곤한다.

물론 개중에는 그런일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어서 기사화 되기도 하고
그래선지 연예인에 대한 편견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일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한 사람이다.
3-4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려면 공부하고 준비해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연습도 해야하고
1시간의 프로그램을 녹화하기위해 하루 종일 리허설을 하고 겨우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은 다반사였다.

다음 방송에서 의미있고 질 좋은 방송을 하려면 책도 엄청나게 읽어야 하고
시사문제에 둔감해서도 안되었기 때문에 꾸준히 공부해야 했다.

외국어는 필수적인 것으로
외국인 출연자와 대화를 나누기 위한, 그것도 방송을 위해서
겨우 남는 시간 새벽반을 이용해 외국어를 배우러 부지런히 다녔었다.
영어와 일어를 배웠고 그렇게 배운 외국어는 해외촬영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바쁜 스케쥴에 지치면 우선 쉬어야 다음 방송을 잘 할 수 있고 그렇기에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일이나 밖으로 돌아다니는 일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예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계발과 노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우리말을 정확하게 발음하고 표준어를 쓰기 위해 정기적으로 국문학과 교수님께 강의도 들어야 했고
정치, 사회, 문화, 예술, 전반적인 기본 상식은 알고 있어야
어떤 출연자가 섭외된다해도 자연스러운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음악프로그램을 진행할때는 음악에 대해 공부해야 하고 끊임없이 발전하는 음악에 대해 공부해야 했다.
클래식도 알아야 했고, 재즈도 블루스도 발라드도 포크도 힙합도 퓨전음악도
모두 들어야 했다.

89년, 나는 유럽음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적이 있었다.
영어도 아니고 내가 전혀 모르는 불어와 이태리어를 소개해야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유럽음악 역사책을 사서 읽었고
방송 시작 2시간전쯤 레코드실에 가서 그날 방송될 음악들을 찾아 듣고 또 들었다.
그러다보면 그 노래 가사안에 제목이 한번쯤은 나오게 되어있었기에
그대로 발음을 따라하면, 샹송이든, 칸쏘네든, 제목을 제대로 소개할 수 있었다.
그렇게 노력했기때문에 청취율이 올라갔고 그만큼 보람을 얻을 수 있었다.

10살때부터 들어왔던 가요와 팝송들은 방송 디제이로 일하는데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날 무렵 유행하던 가요에 관한 역사라든가 그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 가수에 대한 정보, 시대적 상황, 을 거슬러 올라가며 새롭게 공부했었다.

오로지 일과 집에 있는 일.
그것밖에 몰랐다.
CF를 찍을 때는 단 20초짜리. 15초짜리를 만들기 위해 이틀밤을 꼬박 새우며 촬영을 하기도 했었다.
그것은 보통 고난의 일이 아니다.

그래도 요즘은 분위기를 살리기위해 신나는 음악도 틀어주는 배려를 한다던데,
예전에 그런 배려는 기대할 수도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한겨울인데 봄기운을 내기위해 제주도에 가서 CF 를 찍을 때,
광활한 목장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다른 스탭들은 오리털 파카를 걸치고도
덜덜 떨고 있는데,
나는 얇은 봄 원피스 차림으로 O.K 싸인이 나올때까지 오돌오돌 떨면서도
웃음을 짓고 콘티에 준비된대로 연기를 마쳐야 했다.
그리고는 앓아눕고 그럼에도 다음날 빠듯한 스케쥴에 방송을 하고......

생수 CF를 찍을 때는 생수를 얼마나 마셔야 했는지
나중에는 물만 보아도 어지럼증이 날 정도였고
아이스크림 CF를 찍을 때는 배탈이 날 정도로, 아이스크림 먹는 한 장면을 위해
몇 박스의 아이스크림이 옆에 준비되어 있었다.

아기와 함께 찍는 CF는 아기의 잠이 깰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다시 아기가 잠들때까지 기다리는 인내를 필요로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뽀뽀뽀 녹화도 금요일은 연습을 하고
토요일 아침부터 일주일분의 녹화가 시작되는데, 그것은 거의 매주 새벽 4-5시를 넘겨야 끝이났다.

그런 상황에서 녹초가 된 몸으로 도대체 어딜 놀러다닐 수 있으며
누구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연예인들은 사회에 대해서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더러 신문에 오르내리는 성상납? 이런 문제는 나는 들어본 적도 겪어본적도 없다.

물론 나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모든 연예인이, 사치와 환락과 비리와 연계되어 있다는 말이 아니란 얘기다.

나는 20년 방송생활을 하는 동안 피디나 방송관계자들에게 선물이나 촌지(?) 같은 걸 건네본 적도 없고 어떻게 전달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청취율이나 시청율을 올려놓는 것에 몰두할 뿐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했던 덕분에 상도 많이 받았고
년말 특집프로그램이나 긁직한 행사의 진행을 도맡아 해왔었다.

그러나 요즘은 세태가 많이 바뀌긴 한 것 같다.
매니지먼트 회사가 연예인을 상품처럼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무언가 달라지긴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서 오히려 나는,
지금 이런 복잡한 방송계에서 방송을 하지 않고 있는 것에 어느 정도는 감사하고 있기도 하다.

불교방송의 백팔가요를 진행할때의 자유로움과  청취율이 올라갈때의 기쁨,
가족같이 지내던 방송식구들을 떠올리며 씁쓸해지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그것은 내 의지도 방송국의 의지도 아니었고, 순전히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몇명 안되는 안티활동자들이 방송제작에 차질을 빚도록 방해를 했기 때문에
내 양심상, 나로 인하여 다른 프로그램까지 피해를 보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휴가를 신청했다가, 휴가기간 중 제작팀을 만나 사의를 표했기 때문이었다.

방송관계자들은 아까운 진행자를 놓치게 됐다고 안타까워했고
다음에 다시 꼭 만나 일하자고 약속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방송국을 나섰었다.

연예인들이 일반 대중들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뒤에 가려진 피나는 노력과 인내와 사생활침해의 피해와
안티들이 함부로 써대는 인신공격의 글에 상처받는 아픔,
그로인해 더욱 사회와 격리되는 고독감. 괴리감. 고통. 등등
이런 것들을 보지 못하고
무대위에서 화려한 치장을 한 모습만을 보고 동경도 하고 환호를 한다.

그리고 또 우스운 일은,
앞에서는 환호를 보내고 동경을 하고 부러워하면서
보이지 않는 뒤에서는 갖은 음해와 인신공격, 허위사실유포를 서슴없이 하는
이중적 모습을 가진 대중과 연예인의 관계다.

나는 오늘도 몇몇 연예뉴스 에 대한 분분한 의견중에 공통적으로 많이 쓰이는
"연예인이란 다 그렇지 뭐!"
"깨끗한 연예인이 어디있어?" 라는 편견을 대하고 마음이 아팠다.

요즈음 몇몇 가정주부들이 캬바레나 성인나이트를 드나들며 탈선을 한다는 보도가 나올때,
"요즘 가정주부들이 다 그렇지 뭐! 안 그런 여자가 어딨어!" 라고 말한다면
분개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대다수의 성실한 주부들은 자신들을 모욕했다며 단체행동을 구상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신은 조그만 오해 한가지로도 잠을 못자고 분해서 꼭 해명을 하고 사과를 받아내고도 여전히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것은 경험해 본 분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별의 별 모욕을 다 당하고 명예훼손을 당해도
참아야만 한다니,
이런 인권유린이 어떻게 용납될 수 있단 말인가.

"연예인이라 해서 다 그렇지 않다"
성실하고 일밖에 모르는 순진한 연예인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단지 그들은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 묵묵히 자기일에 충실하기 때문에 크게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잘한다는 칭찬에는 인색한 우리나라 대중들의 인식아래에서
연예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모진 수모를 견뎌내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하는 강한 정신력과 일에 대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누구 하나 힘들지 않은 사람없고, 힘든 일 아니 것 없다지만,
연예인의 생활이야말로 3D 업종중에 속해야 할 정도로 힘겨운 일이다.
그러나 그 고난을 기꺼이 즐기며 성실히 살아가는 다수의 연예인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엉터리 모욕과 음해를 당하는 일은 없어져야 할 일이다.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어서라면, 차라리 실컷 욕만 할 수 있는 싸이트에 가서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면될텐데
왜 애매한 연예인에게 욕을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모욕을 하는 일을 하는지
그 심리상태를 몰랐었는데,
최근에는 어느정도 알게 된 부분도 있다.

연예인에 대한 '안티'란 또 다른 형태의 팬클럽이라는 것이다.
관심이 없으면 안보면 되고 신경쓰지 않으면 될텐데
매일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며 모욕을 일삼는 것도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것인데,
단지 그 관심의 표출방법을 좋지 않은 언어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언젠가, 그랬던 자신에게 수치심과 모멸감, 자괴감과 죄책감을 가져오게 되어 본인이 괴로워지는 때가 올 수 밖에 없다.

어차피 동족끼리 하는 말, 예쁘게 봐주고 좋은 말들 나누며 아름답게 살고 싶다.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편견은
'연예인은 다 그렇지 뭐! 어디 깨끗한 사람 있겠어?" 일 것이다.

물론 진짜 나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연예인이라기 보다
연예인이라는 허울을 쓰고 부업으로 삼으며 다른 나쁜일을 도모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라, 연예인의 범주에 넣어서는 안된다.

다 그렇지 않다. 깨끗하고 순진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단지 그들은 정치적이지 못하고 내성적 경향이 강해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이다.
뿌리깊게 박힌 연예인에 대한 편견이 조금은 바뀌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