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5월 24일. 백자가 좋다.

목향 2009. 3. 21. 14:29

제목 : 2003. 5월 24일. 백자가 좋다.

에릭 크랩튼의 몬트리올 공연 모습을 보았다.
어떤이들은 왕년의 에릭 크랩튼의 기타 솜씨가 빛이 바랬다고 실망의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나는 오히려  60이라는 나이가 다 된 에릭 크랩튼의 연주에서 단아함, 간결함,
절제된 아름다움을 느끼며 도자기 중의 '백자'를 떠올렸다.

지미핸드릭스의 기타에서는 현란한 기교, 강한 파워, 누구도 차마 넘볼 수 없는 강한 카리스마에
사람들은 그를 전설적 기타리스트로 추앙하고 있다.
그러나 지미 핸드릭스가 죽지 않고 아직 살아 기타연주를 한다면
그때도 젊은 시절과 같은 현란한 연주만을 고집했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렉트릭 기타를 다시 잡은 에릭 크랩튼의 연주에서는 기타 노이즈등, 이펙트를 사용하면서도
그 연주가 전혀 귀에 거슬리거나 시끄럽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두 내로라 하는 연주자들이 세션으로 참가했고 특히 드러머는 그 실력을 알아주는
최고의 드러머라고 정평이 나 있는데도 누구 한 사람, 튀는 소리를 내지 않는
절제된 음악을 보여주어 나는 무척 행복하게 연주를 들었고
세월의 흐름과 인생의 역경을 견뎌내며 음악에 대한 견해가 달라져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우리는 그래서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영화에 머물러만 있어서는 세상과 유리되어 독불장군식의 음악으로
오히려 퇴보하는 음악을 하게되며 따라서 그것은 곧 자멸의 길이 된다는 것은
많은 스러져간 아티스트들에게서 이미 봐왔었다.

연한 면바지와 흰색 셔츠 하나,
무대의상이라고 볼 수 없는 평범한 옷차림으로 기타를 연주하는 나이 60의 에릭크랩튼은
내겐 너무 멋졌다.
화려한 의상보다 기타가 더 아름답게 돋보이도록, 기타와 음악 소리를 중요시하는 컨셉이
마음에 들었다.
기타를 들고 무대에서 쇼를 연출하지도 않았고  그럼으로 거장다운 모습을 인간적으로 보여준 공연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웠던 것은 관객의 멋진 관람태도 였다.
멋진 관객이 있을 때, 공연의 질도 좋아진다는 것은 원칙이다.

요즘 우리 가요계에도 때아닌 모던 롹 그룹 열풍이 서서히 불어오고 있다.
아직 그들이 내는 소리는 시끄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초보의 연주실력을 가졌을 뿐인데도
젊은 대중들은 그 멋에 빠져들어 환호를 보내고 기교에 속아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음악은 없고 연주도 없으며 노래도 없이 립씽크를 하며
특이한 의상들으로 댄스를 보여주며 무대위를 누비고 카메라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는
무례함을 마치 개성이며 자기표출이고 멋이라고 생각하던
댄스뮤직의 열풍이 서서히 사라지고 서툴지만 진짜 연주를 하는 음악 밴드들의 등장은
우리 가요계에서는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악기가 그렇듯, 기타라는 악기도 잘 치려면 적어도 10여년은 온통 기타만 잡고
몰두해야 하는 고난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10살때부터 기타를 쳤고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까지도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기타를 잡고
팝송 책 첫페이지부터 맨 끝 페이지까지 모두 연주하고 노래를 불러보고 나서야
다음 일을 했었다.
그러나 독학으로 배운 실력은 그리 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었다.

처음 통기타 가수로 데뷔를 하고나서 바로 진행자로 활동했던 까닭에
거의 15년간은 기타를 칠 수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기타실력은 퇴보해서 지금은 오히려 내가 중학교시절 치던 실력보다 못한
기타를 치고 있다.
그래도 매일 연습을 하다보니, 30년이라는 구력이 있어선지 조금씩 자신이 붙고
터치를 힘있게 할 수 있는 정도의 발전이 있었다는 것만도 내겐 상당히 기분좋은 일이었다.

어차피 에릭크랩튼이나 우리나라에서 기타를 잘 친다는 연주자들만큼은
평생해도 따라갈 수 없을 것을 알기에
나는 나 나름대로의 주법을 익혔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데 주력하며
매일 연습을 하고 있다.
현란한 기교는 없어도 박자에 정직하고 자신있는 터치를 하기위해 연습하는 것이다.

나는 요 몇년사이에 달라진 내 모습을 발견한다.
일체의 장식이나 장신구를 배제한 심플하고 평범한 의상을 좋아하고
화장도 그다지 하지 않는다.
클래식이 좋아지고 재즈나 블루스를 즐겨 듣는다.

아무리 화려한 그릇에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아무런 무늬도 색채도 없는 흰 식기에 눈길이 간다.

도자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백자'더라 라고 말했던 일본 도공의 말에
깊히 공감했기에
나의 생활 역시. 단아하고 정갈하며 단순한 형태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좋은 기회에 에릭크랩튼의 공연을 보고
은은하면서도 한없이 빠져들게 하는 '백자'를 떠올렸고

나는 '백자'처럼 내게 남은 시간을 살고 싶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백자를 잘 빚는다는 것은 그 어느 도자기를 빚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