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5월25일. 지인과의 이별

목향 2009. 3. 25. 14:53

제목 : 2003. 5월25일. 지인과의 이별

오늘, 내가 알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1년반전, 그는 나와 같은 병명인 '직장암' 판정을 받고 수술후, 항암치료를 계속해왔었다.

그는 80년대 후반부터 94년까지 내가 진행해왔던 MBC-FM '정오의 희망곡'을
거쳐간 피디였다.
6년간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몇명의 프로듀서가 바뀌었는데
그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에도 기백장군이라 불릴 정도로 패기 넘치고
건강관리를 꾸준히 잘해왔고 운동도 열심히 해왔었기 때문에
그 피디가 '암환자'가 되었다는 소식은 모두가 놀라는 일이었다.

1년반전 수술울 마치고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준비를 해왔었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몸이 좋아지는 듯 하더니
결국은 너무나도 빨리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나는 "제발 그 항암치료라는 것 좀 받지 마! 그 항암치료때문에 면역력이 형편없이 떨어지고
정상세포를 파괴해서 없던 병까지 만든단 말야.
그렇게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지독한 항암 약물치료는 몸의 자생력을 없애고
암세포는 그 틈을 타서 조금씩 허약해진 부분으로 파고 들어간단말야!"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대부분의 암환자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살고싶은 집착에, 무엇이든 해 볼 수 있는 치료는 다 해보겠다고
현대의학을 너무 신뢰하는 경우가 많아서
내가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었다.
모든 것은 본인 스스로 어떻게 마음먹고 결정하느냐에 달려있다.

나는 몇번 맞아 본 항암 주사 치료에 그만 순간에 질려버렸었다.
더구나 마음대로 누워 쉴 수도 없고 간병해 주는 사람도 없고
음식냄새에도 구토를 하는 상황에서 내게 밥을 차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이미 방사선 치료의 화상 후유증으로 비명을 지르며 뒹굴어도
들여다보는 사람 하나 없이 방치또는 유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에 알려진 것과는 정 반대의, 암환자 학대 상황에 놓여졌을 때,
모든 삶에 대한 집착을 던져버렸었다.
병원 문밖까지 쫓아나오며 "항암치료를 받지 않으면 당신은 죽는다"며
치료받기를 설득하던 의사의 손을 나 홀로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대학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살아있을 때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하려했다.
힘겨운 몸이지만 스키도 탔고 방송도 하다가
하와이로 떠나버렸다.
그때는 더 이상, 어떤 사람의 폭력에 시달리다 마지막 탈출구로 찾은 도망의 성격을 지닌 여행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내게 호화스런 요양을 간다며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내가 하와이로 떠나버리자
신났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거의 매일 수상스키장에 젊은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 수상스키를 즐기고
놀러다니는 자유를 마음껏 누렸으니 얼마나 행복했었겠는가....
그때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던 목격자들은 부지기수였다.

나는 감옥에 갇힌 것 같은 혹독한 생활에서 벗어난 후, 병원치료를 받지 않았음에도
차츰 상태가 좋아지고 있었다.
내 상태가 점차 좋아지자
계획에 차질을 빚은 것에 대한 두려움에 짜증을 부린 사람은 따로 있었다.

끔찍한 기억이다.
나처럼, 아마 나처럼, 암으로 생사의 기로에 서서
통증과 시달리며, 간병은 커녕 학대를 받으며 고통의 시간을 지낸 암환자가
또 있기는 한 것인지 묻고 싶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억울하고 원통하다.
어떻게.....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장난질을 칠 수 있단 말인가말이다.
그리고 그런 악행을 숨겨줄 수 밖에 없었던 나의 무기력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오늘 세상을 떠난, 나와 함께 일했던 그 피디는 6-7명이 지속적으로 정성껏 수발을 들었고
비교적(암환자의 통증은 상상이상의 것이지만)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했다.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한 아이를 둔 그.
이제는 더 이상 그 피디의 뻣대는 소리도. 장군처럼 웃던 웃음소리도
들을 수 없어진 것이다.

그가 그리도 빨리 세상을 등 질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듯이
우리의 삶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개될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스트레스가 암의 원인 중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내 성격에 못이겨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야,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으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 억울하게, 나는 가만히 있는데 주위에서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에 놓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성숙한 인격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길러야 하겠고
자신의 양심에서 하는 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빨리 죽어라!" 라고 험악한 욕설을 내뱉었던 어느 인터넷 카페 회원들이
"그년 참 잘 죽었다." 라고 또 쓸 수 있을까?

만약 그런일이 벌어진다면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일 뿐이다.
나도.... 오늘 눈 감은 모 피디처럼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 암환자다.
사람들은 곧잘 그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자신이 아프지 않기때문에 남들도 그러려니 생각하는 짧은 생각에서 오는 오류다.

오늘 내가 알던, 나와 함께 일했던 피디가, 나와 같은 종류의 암으로 세상을 떠난
소식을 듣고, 나 역시 깊은 생각에 빠졌었다.
지난날의 악몽도 떠올랐다.
이제는 더 이상 불필요한 쓰레기같은 곳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안티에서의 음해와 모욕과 허위사실 유포가 계속된다면
이제는 참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각오를 다졌다.
내가 비난받을 이유가 있다면 단 한가지,
대중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며
학대받으며 간병받는 척,
불행하면서 행복한 척,
불의를 알면서 폭력에 의해 눈감을 수 밖에 없었던 점.
그때 사실을 말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이다.

그 외에는 모두 허위이므로 내가 비난받고 조롱받을 이유가 없다.  
이제는 참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일은 순리대로 풀릴 것을 믿는다.

기백장군으로 불렸던 피디.......
부디 좋은 곳에서 이승의 더럽고 추악한 일 겪지 않고 편안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