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5월 27일. 강습받다.

목향 2009. 3. 25. 14:56

제목 : 2003. 5월 27일. 강습받다.

실로 오랜만에 큰 맘 먹고 언니와 함께 나들이에 나섰다.
고향으로 가는 경춘가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강과 푸르러진 나무들 사이로 싱그러운 바람이 자연의 냄새를 전해왔다.

얼마만의 외출이던가!
록시 공연을 쉬는 날, 언니는 나를 부추겨 밖으로 끌고 나갔다.
자동차 트렁크에 언니의 것과 내 것의 인라인 스케이트를 싣고
커피포트엔 뜨거운 커피도 준비했고
참외도 예쁘게 깎아 담아 준비한 소풍가는 분위기의 외출이었다.

닭갈비는 환상적으로 맛있었고
이례적으로 나는 밥을 잘 먹었다.
"그렇게 잘 먹는 것 처음 본다" 라며 기뻐하는 언니 모습에 더욱 열심히 먹었다.

카페지기를 만나서 우리는 인라인 스케이트장에 도착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강습이 있다해서 언니와 나에겐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인라인 스케이트 동호회 회원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그토록 많은 인라인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들의 수에, 나는 놀랐다.

내가 처음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한 것은 98년 초,
그때만 해도 탄천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과 마주치기란
아주 드문일이었다.
그런데 그 몇년 사이, 이제는 각각의 동호회에서 강습도 이어지고
함께 로드도 타고 그 실력은 상상 이상의 놀라운 것이었다.

연령을 초월해서 열심히 운동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곳에서는 모두 하나가 되었다.

나의 언니는 처음 신어보는 인라인 스케이트였는데도 초보라고는 볼 수 없을만큼
놀라운 운동신경으로 링크를 누볐다. 그것은 우리 가족 모두가 어릴 적부터
얼음판 위에서의 스피드스케이트를 잘 탔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의 즐거운 운동시간을 기꺼이 포기하고 나의 언니를 가르치기 위해
시간을 할애한 카페지기네 선생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이다.
나의 언니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 최고령인 그 나이에 인라인 스케이트에 도전하겠다는
의지에 동호회 회원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나의 언니는 운동이라면 거의 모든 종목을 섭렵한 상태라
테니스도 수준급, 볼링은 선수급, 배구면 배구, 농구면 농구, 스케이트면 스케이트
탁구면 탁구, 웬만한 운동은 조금 하다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의지를 놓지않고 수준급에 도달하고야 마는 근성이 있는데,
나는 언니의 그런점을 참 좋아하고 존경하고 있다.
그리고 골프를 치지 않는 언니를 나는 더욱 좋아한다.
나 역시도 골프에는 그다지 취미가 없다.

링크를 몇바퀴 신나게 돌았고 다시 강습장소에 모였다.
누군가 슬쩍 내 옆에 다가와 물었다.
"처음 타시는 것 아니시죠? 아까 링크 도는 모습 봤거든요"
"그런데요, 본격적인 강습을 받는 것은 처음이에요" 내가 대답하며 웃었고 그도 웃었다.

카페지기는 내게 뒤로 에스자를 그리며 가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고
사람들이 빠져나간 한가한 틈을 타,
"천사가 찾아왔어~ 천사가 찾아왔어~" 노래와 함께 춤을 추며
뒤로 S 자를 그리며 도는 장난을 했다.

내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것을 책에서 보고 자신도 타보겠다고 결심했다는 카페지기는
얼마나 열심히 탔던지, 대표선수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감탄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그러나 뒤로 가는 S자 형태는 아직?)

언젠가 한번 같이 스케이트를 타보자고 기약없는 말만 주고 받다가
드디어 함께 스케이트를 즐겼고 건전한 운동으로 주위사람들과도 격의 없이 친해지게 되었다.

늘상 코코샤넬과 타던 인라인 스케이트를
여러사람과 함께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며 함께 탄 기억은 좋은 추억으로 기억될 것 같다.

평소보다 많은 운동량과 강도높은 강습 훈련으로 허벅지 근육이 뻐근하고
온몸이 나른하지만 그것은 아주 기분좋은 피로감이었다.

정신적으로 받는 스트레스때문에 무기력해지고 나른하며 불쾌한 피로와는
차원이 다른 신선한 나른함이었다.

이제는 다시 본래의 내 모습을 찾아야 한다.
이제 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96년 암 판정을 받기 직전까지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아이스 댄싱 동호회'에 가입해
아이스댄싱을 배웠었다.
제대로 균형감각을 익히기도 전에 암발병 소식을 알고 급하게 입원하고 수술하고 투병하느라
내 피겨스케이트는 아직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고 건전한 일,
운동, 그 중에서 그때 못다한 아이스댄싱을 다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의 리듬감은 음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더욱 그렇다.

나는 오늘, 의욕과 자신감을 되찾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이고 건전한 삶의 길을 펼쳐나가기로 결심했고
그로인해 비탄과 억울함,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던 나를
구출해 내기로 했다.
아마도
오늘 언니와 떠났던 짧은 외출과 인라인 스케이트 타기, 강습, 카페지기와의 만남
등이 큰 도움이 됐을 것 같다.

나른하지만 기분좋은 피로를 느끼는 행복한 하루였다.

아... 얼마나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던가!
이제 그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갈 것이다.

나는 정직과 진실을 사랑하며 원칙을 지키고 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