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4. 5월 1일. 두려움

목향 2009. 4. 25. 14:08

제목 : 2004. 5월 1일. 두려움

'희망과 불안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희망 없는 불안도 없고
불안 없는 희망도 없다"

집으로 올라가기 위한 엘리베이터의 벽면에 붙어 있는 글귀를
유심히 보았다.
무거운 기타케이스를 들고 힘에 겨워하며 건물 층수가 쓰여진 버튼을 누르고
주저앉아 올려다 본 벽면에 붙어 있던 글귀였다.

엘리베이터는 현기증이 날 만큼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최근 1주일 가까이 폭풍이 몰아치도록 정신 없었던 혹독한 스케쥴을
견뎌낸 것처럼 말이다.
아마 그 즈음은 밴드 멤버들이 모여 즐겁게 연주에 몰입하는 것 보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각자 다른 성향과 부딪히며 이해하고 알아 가는 과정이
더 복잡했던 것 같다.
그리고 협연이 시작되었다.
우여곡절 많았고 두려움이 가장 크게 엄습해왔다.

"그냥 반주음악 틀어놓고 노래 부르는 게 훨씬 편하고 수입도 안정될텐데,
왜! 무엇 때문에 '밴드와의 연주 생활을 시작해
돈도 못 벌고 고생을 자초하느냐고"
의아해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음악적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 밴드생활을 결정하고 밀어 부치는
내 의지를 좋게 평가해주는 이도 있었다.

누구나 꿈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우선 수입이 적어지고 지출은 많아지며
멤버간의 마찰과 분란을 겪는 동안의 스트레스까지 감수해야하는 것에 질려,
'밴드 생활'을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돈을 바라고 음악을 한다면 '밴드와의 음악'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선택했다.
돈이 아닌, '음악'에 희망을 걸었다.

매일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밥먹는 시간도 없이, 방송에 할애하는 시간 이외에는 몽땅 기타연습에 몰두했다.
안 쓰던 기타주법을 익히기 위해 손에 익을 때까지 치고 또 쳤다.
왼손 검지 마디에 금세 물집이 생겼고 기타 1번 선을 당겨 치는 주법 때문에
손가락을 베었다.
그래도 연습을 멈출 수는 없었다.
물집이 잡힌 상태에서 계속 같은 주법을 연습하니, 물집은 터졌고
손마디의 피부가 벗겨져 나갔다.
기타 지판은 내 손가락의 물집이 터져서 나온 액체가 묻어 젖어 있었다.
쓰라린 통증이 소름 돋게 했지만, 그렇게 연습하지 않으면
'밴드 음악'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맡은 파트의 연주를 소홀히 했다가는 '불협화음'이 나기 때문이다.

나는 '남들이 말하는' 험난한 길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 가르쳐 달라고 사정했다.
순간 순간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떠올리기도 했다.
한끼도 먹지 않고 잠도 잘 수 없었으면서도 연습시간이 주어지면 행복해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밴드와의 음악'은 내겐 새로운 희망이었으며
또한 불안이었다.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풍성한 컴퓨터 미디음악에 익숙해 진 감각을 가진
대중들이 과연 4인조 밴드의 허전할 음악에 과연 반응을 보일까?

그 모험을 오늘부터 시작한 셈이다.
우리는 북극에 가서 냉장고를 판다는 심정으로 냉정한 사회와의
정면돌파를 해야했다.

반주음악을 틀어놓고 노래부르는 가수의 모습에 몇 년간이나 익숙해 있던
라이브클럽을 찾아오는 분들은,
무대에 오른 '길은정과 와이키키브라더스 밴드'를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산타나의 '삼바파티' 연주를 시작으로 공연의 막을 올렸는데
사람들은 그 마저도 어렵다고 했다.
그나마 대중적이고 쉬운 곡들로만 선곡해서 연주하고 노래하기로 한 것인데도
우리의 레파토리를 어려워했다.

희망을 가지고 시작한 '밴드생활'
내공이 깊은 최기타의 일렉트릭 기타연주와 드럼,
보컬과 베이스기타를 연주하는 이베이스
어쿠스틱 기타와 보컬을 맡은 나.....
이제 우리는 세상 밖으로 첫발을 디뎠고 갈 길이 험난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최악의 상태인 악기로 (드럼) 온 몸이 땀 범벅이 되도록 열심히 연주를 해 준
김 드럼에게도 감사하고 최기타와 이 베이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었고
거의 2년여 동안 이어진 내 설득에 못 이겨, 우리 밴드에게 무대를 내어 준
미사리 라이브 클럽 '록시'에게도 감사했다.

오늘 첫 연주를 마치고 관객반응을 살피며 초조했고 불안했으며
두려움이 밀려왔었다.
언젠가는 우리의 음악을 이해하는 이들이 생겨나겠지.....
희망을 가지고 지쳐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기타를 꺼내들고 연습을 시작했다.
새벽녘, 이웃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아주 조그만 소리를 내며 연습을 해야한다.
희망과 함께 불안이 찾아왔고 또 희망이 타올랐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연주, 더 안정된 연주를 해야함에 두려움이 밀려온다.

왜 나는 이 험난한 길을 선택했을까.....
그것은 그저 운명적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나는 신대륙을 찾아 떠나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심정으로
두려움 가득한 항해를 시작했다.
바로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