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4. 4월 6일. 설명

목향 2009. 4. 25. 14:07

제목 : 2004. 4월 6일. 설명

거의 두 달 가까이를 지내면서 오른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녔다.
매일 통증때문에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병원에 가지않는 나를 보다 못한
언니의 들볶음이 계속되어서라는 이유가 있기도 하지만
움직이고 걷기에 너무나 불편하고 아픈, 통증이 심해져서
못 이기는 척, 언니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물론 의사선생님으로부터 혼나고 말았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병원에 오지 않았느냐는 질책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느냐는 의사의 질문에
나는 또 장황한 설명을 해야했다.

"지난 2월에 히스테리성 발작을 일으켜 오른쪽 마비가 온 적이 있는데요.....
안면근육 마비는 침을 맞았구요. 어느 어느 병원에 갔었구요.... 어쩌구 저쩌구..
오른쪽 다리가 아팠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을줄 알았는데... 점점 더.... 중얼 중얼"

마비가 왔을 때 바로 치료를 했더라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됐을텐데
피로에 시달리고 시간에 쫓기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병원 치료를 받지 않은 것이(사실은 병원이라는 곳 자체에 가기 싫었던 것)
앞으로 한동안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처벌로 다가왔다.

다리 아픈 부위에 주사를 맞고 통증 크리닉 치료를 마치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리치료까지 받아야 한다는데... 방송 시간에 맞춰 나가야 하기때문에
물리치료는 받지 않았다.

"주사 놓았으니까 이제 좀 쉬셔야해요" 라고 말하는 의사에게
"저 지금 생방송하러 가야 되거든요?"라고 말하니, 조금 당황해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럼 저녁에 뜨거운 찜질 꼭 하세요. 내일은 물리치료까지 받으시고 쉬세요"
라고 한다.
"내일도 생방송인데요........" 내 말은 기어 들어갔다.

"주사를 놓았기 때문에 더 아프고 힘들텐데요..." 의사가 말했다.
"할 수 없죠 뭐. 괜찮습니다" 라고 대답하며 병원문을 나섰다.

실제로 병원에 들어갈 때보다 치료를 받고 나올 때는 더 걸을 수 없을 만큼
다리에 힘이 풀리고 아팠다.
"어떻게 멀쩡해서 들어갔다가 불구가 되어 나오는 것 같아"
나를 부축하는 언니와 농담을 하고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 프론트 데스크 직원이 눈이 휘둥그래지며 물었다.
"아니! 웬일이세요? 다치셨어요?"
또 설명하는 일은 어려웠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던 언니의 친구가 오셨다.
"어머머? 왜 그러니? 걸음이 왜 그래?"
또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됐어요 언니. 자세한 얘기는 우리 언니랑 차타고 가시면서 들으세요. 킥킥"

방송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라이브 우체통'코너가 있는 날이라 악기들을 챙겨야 했다.
봉고나 장구같은 큰 악기들은 방송국에 두고 다니지만
마라카스. 카바사, 탬버린과 드럼스틱 등은 매주 가방에 따로 넣어
가지고 다니기 때문이다.
나무재질의 빨래판도 있기에 집을 나서면서 만나는 이웃들로부터
이상한 시선을 받아왔었다.

오늘도 영락없이....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사람들의 시선은 빨래판에 가 있었다.

"아.. 이거 악기예요" 라고 말해야 "아하!" 하고 의문의 시선을 풀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만나는 사람들은 나의 빨래판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래서 내가 먼저 웃으며 설명했다.
"아, 이 빨래판요? 악기로 쓰는 거라서요...."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알겠다는 듯 돌아섰다.
다리는 절며, 요상스런 것들을 가방에 넣어 메고 있으니..... 그럴만도 했겠다.

방송국에 도착했다.
방송국 식구들은 이제 더이상 내가 가지고 다니는 빨래판이나 탬버린등에 대해선
묻지 않아,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평소보다 다리를 더 심하게 저는 나를 보고 놀라 물었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다리가 왜 그래요?"

"네... 병원에 다녀왔는데... 주사를 맞아서... 중얼 중얼... 어쩌구 저쩌구..."

몇 발자국 걸어 또 다른 직원을 만났다. 또 설명했다.

통증을 참으며 똑바로 걸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반복적인 설명을 해야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다.
실은 묻는 이들도 인사치레일 뿐, 진정으로 어떤 연유로인해 다리를 절고 있는지
속 내막을 알고싶어 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말이다.
'어디 가세요?
"어떻게 지내세요?"
"저녁 드셨어요?" 등등.....
실제로 설명하자면 너무나 길고 긴 사연들이 있지만
그 사연을 듣고 싶어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불필요한 인사치례로 낭비하는 시간도 많은 셈이었다.

매일 만나거나 얘기를 나누고 일을 하며 정을 나누는 사람들.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고 알아채 주는 사람들.
그런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참으로 편안하다.

나는 참 오해를 많이 받는다.
아파도 우울해도 잠을 못자도 힘들어도
좀체 얼굴에서 그런 기색을 발견할 수 없는데다 항상 웃고 있기에
내가 아프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언니도 내게 묻는다.
"넌 참 신기해. 그렇게 아프면서 어떻게 그렇게 티를 안내니?
너 노래하고 방송할 때는 그게 어디 아픈사람이니? 생생하기만 하다 얘."
나는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또 다시 그냥 웃을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