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

영화, 윤희에게 글 / 김종선 (목향)

목향 2021. 1. 27. 14:24

영화, 윤희에게

 

너를 만났던 시절, 참으로 행복을 느꼈어. 그렇게 충만한 삶은 결코 또 오지 않을 거야. ”

너는 나한테 동경의 대상이었어. 너를 만나고 나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어.”

 

위 구절은 영화 윤희에게에서 두 주인공 편지글의 한 대목들이다. 이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이고 한 사람은 한국인, 또 한 사람은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로 보통우정을 넘어 동성애 관계다.

하지만 영화 전반 어디에도 에로티시즘적 언어나 몸짓은 한 장면도 없고 편지를 한 번씩 쓰는 것으로 주를 이루지만 뒤에 실제 만났을 때도 표면적으론 두세 마디의 인사가 전부다. 아마도 이러한 함축적이고 절제된 영상이 상상의 나래를 펴고 내일을 짐작하고 꿈꾸게 하기에 잔잔한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참으로 오랜만에 진지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었기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임대형 감독으로 윤희역에 김희애쥰 이 역에 일본 배우 나카무라 유고가 주연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를 보게 된 동기는 배경이 오타루의 눈 천지 때문이다. 잘 알려진 이와이 슌지감독의 러브레터에서,

오겡기 데스까,!” 라고 외치던 그 장면을 많이들 기억할 진데 바로 그 무대가 설원의 오타루고 또한 2019년 부산 국제 영화제 폐막 작품으로 꽤 좋은 평을 받았다는 홍보기사가 한몫을 더 했다.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면 윤희와 쥰은 사랑하는 사이지만, 어른들의 반대와 시대적 배경이 절대 용납하지 않았기에 윤희는 사랑 없는 결혼으로 딸 새봄을 낳지만, 이혼하고 쥰은 일본에서 미혼으로 그의 고모 마사코와 단둘이 오타루에서 살며 수의사로 일한다.

이후 20여 년이 흘렀고 그간 둘은 마음에만 간절히 자리할 뿐 어떠한 만남이나 연락도 끊긴 채 지나지만 수 없이 썼다 지우는 의 편지를 안타까운 마음에 고모가 조카 몰래 발송하게 되고 그 편지를 먼저 보게 된 윤희의 딸 새봄이 엄마를 설득하여 오타루 여행을 감행하게 된다. 윤희는 마지못해 따라간 것이 아니고 혹시나 아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을 만나고픈 간절함에 직장을 잃으면서까지 실행한다. 세월은 흘렀어도 그들의 변치 않은 사랑의 감정을 잘 대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한 여행에서 을 만나게 되지만 막상 목전에서 윤희는 눈물을 훔치면서 발길을 돌린다. 그의 그러한 모습은 헤아릴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그 벅찬 감정의 폭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여행이 끝나가도록 재회 없는 두 사람, 딸의 안타까움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만남으로 이어주지만, 똑바로 얼굴은 마주할 수 없는 극한의 농축된 감정의 연출, 보는 이의 마음조차 안타깝지만 결국 이 한 번의 만남은 이후 각자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죽지 못해 사는듯한 오랜 고뇌와 침체에서 벗어나 꿈과 희망이 있는 밝은 내일을 기약한다.

사랑의 물음에 무어라 답해야 할까!

사랑은 인간관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하고 오묘한 감정으로 여러 가지 복합적인

심리적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다차원적인 요인을 가지며, 인지적인 요소와 행동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고 신뢰, 믿음, 행동이 표현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사랑의 진가는 어떤 말이나 표현보다는 마음, 생각, 느낌으로 스스로 정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그 넓고 깊은 내면을 적나라하게 말이나 몸짓으로 표출 할 수 있겠는가!

사랑! 사랑은 참으로 귀하고 소중하다. 인간사에서 이 만큼 무게를 지닌 말도 드물 것이다.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동서고금 위력을 지닌다. 그러기에 어떤 관계에서도 진정한 사랑 앞에서는 잣대가 필요 없는 것 아닐까! 하물며 성 소수자라 해도 손뼉 칠 일은 아니지만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개인으론 삶 전체일 수도 있으니까. 또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더구나 어쩔 수 없는 원초적 본능에서 초래되었다면 왜 돌을 던지나? 위 영화의 본질도 그런 면에서 착상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의 숭고한 사랑을 일찍이 인정했다면 그 오랜 기간 방황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무거운 고뇌에서 해방되어 행복했을 것이다. 주인공의 말처럼 절대 부끄럽지 않은 행위임에도 헤어진 이후 여분의 삶이 벌이 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두 주인공 익히 관록 붙은 배우, 주어진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했다는 평을 던지고 싶다. 실제로 우아한 매너의 김희애가 공장 조리사의 평범한 아줌마로 고뇌에 찬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일은 천상배우임을 입증한 일이다. 또한, 딸이나 고모로 분한 조연들도 캐릭터와 완벽 동화되어 매우 자연스러웠다.

나는 이 영화가 끝나고 한참이나 멍했다. 20대의 풋풋한 시절, 잊을 수 없는 한 친구의 얼굴이 겹쳤기 때문이다. 위 주인공처럼 오랜만에 마주했을 때 한마디의 언질도 없이 한 참이나 그냥 서 있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려졌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간관계 복잡미묘하다.

오래전에 나는 삿포로를 여행한 적이 있다. 겨울의 한 가운데를 지나는 폭설의 장을 체험했기에 그때의 추억을, 또한 자신을 돌아보는 또 한 번의 계기로 오타루의 운하길을 걸으면서 깊은 상념에 묻히고 싶다. 매일 흩날리는 눈발, 조용한 도시 싸늘한 공기, 차가운 달빛, 참 매력적인 고장으로 느껴진다. 이 영화는 참사랑, 아니 순수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새삼 일깨워 주었다. 작지만 큰 울림을 준 영화다.

 

 

*월간 ' 한국수필 '2021년 1월호 특집 표지

*2021년 1월호 '한국수필' (특집 3)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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