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타인의 글)

壁, 국물이야기 / (고) 문형동

목향 2009. 7. 14. 21:58

壁   

                                                                                                                                                        文炯東 


  시골엔 집마다 울타리가 있다. 내 집의 지킴이요 네 집과의 가름선이 되기도 한다. 산골 주민은 나뭇섶으로 울타리를 엮고, 바람이 세찬 해안가 사람은 돌담을 올려 이웃을 마주한다. 또한 이들 중 여유가 있는 촌부(寸部)는 울타리 대신에 흙과 돌을 섞어 보기 좋게 담장을 쌓기도 한다.

향수를 자아내게 하는 이러한 모습이, 아직도 시골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러나 도시에는 울타리와 담장보다 벽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날마다 해가 뜨면 솟아오르는 고층 아파트 영향으로 보인다.
울타리나 토담으로 이웃을 삼는 맛, 아파트 벽으로 이웃을 대하는 맛, 이와 같은 환경의 생활이 우리를 얼마나 기쁘고 즐겁게 또는 슬프고 불행하게 하는 것일까.
동작동 현충원에는 담장이 있다. 콘크리트 벽으로 달마산 등성이에 병풍처럼 서 있다. 군사정권 때는 담장 밖에서도 간간히 보초병이 지킬 만큼 통제와 위엄이 따르던 곳이다.
이 담장 밑으로 나 있는 산책로를 거닐 적마다 자못 답답해진다. 조금은 흐트러지거나 느슨해질 수 없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건, 아마도 아파트 벽 같은 담장 때문일 게다. 그런데 이 퇴색하고 먼지 낀 철문이 새롭게 단장되어 열렸다. 담장 중간 중간에 문을 달아 놓아 보초병의 친절한 인사를 받으면서 현충원을 살피러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닫혔던 세계와의 소통이 이루어진 셈이다. 입구에서도 향기 짙은 소나무 숲길, 삶과 죽음의 승리자인 호국영령들의 묘역이 매우 가깝게 여겨졌다.
나는 현충원의 솔냇길이 좋다. 비가 온 뒤에는 송향(松香)이 그윽하여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특히 소나무는 사선의 벽을 뛰어넘은 호국영령들의 푸른 정신을 닮은 듯하고, 쌓인 눈을 못 이겨 나뭇가지 하나를 내줄지언정 비바람에 송두리째 무너지는 잡목과 같지 않는 까닭이다. 
해가 두어 번 바뀌는 사이에 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공사 중이라는 팻말과 함께 상당한 구간의 담장이 한동안 가려지더니, 녹색을 띤 철책으로 변한 것이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한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철책 안과 밖의 풍경은, 툭 트여서 거칠 것이 없는 생령(生靈)의 세계였다. 하여 철책은 시골의 울타리처럼 세워진 경계선에 불과한 것으로 느껴진다.
가슴이 시원하게 트인다. 환하고 투명하게 비춰지기에 보지 못해서 궁금해 하거나, 속내를 알지 못한다고 의심하는 가벼움이 없어진 것이다. 마치 가을이 무르익어갈 무렵 단풍잎이 절반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고, 절반은 땅 위에 떨어져서 나무와 땅이 따로 구분되지 않음과 같은 동경함이 거기에 펼쳐져 있다.
모름지기 벽이란 지키고, 뛰어넘고, 허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극복해야 할 벽이 없는 사람은 불행할 것이다.

  문형동 _전남 화순 출생,<한국수필> <월간문학>로 등단, 수필집 ???두 번 피는 꽃??? ???국물 이야기??? 등.

 

 

♣ 국물 이야기 / 문형동 ♣~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 수록 )

 

우리의 밥상에는 밥과 함께 국이 주인이다.

봄이면 냉이국이나 쑥국의 향긋한 냄새가 좋고, 여름엔 애호박국이 감미로우며,

가을엔 뭇국이 시원하다. 그리고 겨울이면 시래깃국과 얼큰한 배추 김칫국이 있

어서 철따라 우리의 입맛을 돋운다.가을 뭇국은 반드시 간장을 넣고 끓여야 제

맛이 나고, 겨울 시래깃국은 된장을 풀어야 구수한 맛이 돈다. 사람들이 지닌 성품과

애정(愛情)도 이처럼 사계절의 국물맛과 같지 않을까?

 

 

조선 시대 왕들은 해마다 봄이 되면 동대문 밖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 해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왕이 친히 선농단까지 나갔던 것이다.

왕이 직접 제사를 지내니 백성들도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궁궐에서만 사는 왕을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 있고, 또 한 해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

기도 해서였다. 흉년이 든 다음 해는 백성들이 더 많았는데, 그 까닭은 그 곳에

가면 국물을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선농단의 국물에는 은혜와

감사, 또는 마음 속 깊은 기원(祈願)이나 따듯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선농단에서 백성들에게 국물을 나누어 주다가 갑자기 사람이 더 늘어나면 물을 더 붓는다.

그리고 간을 다시 맞추어 나누어 먹는다. 물을 더 부으면 그만큼 영양가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 지난날 우리가 영양가를 따져 가며 먹고 살아왔던가? 가난을 나누듯

인정(人情)을 사이좋게 실어 나르던 고마운 국물이었던 것이다.

 

엿장수 인심에 '맛보기'라는 것도 예외가 아니다. 기분만 나면 맛보기 한 번에다 덤을 주는데,

이 역시 국물 한 대접 같은 인정의 나눔이다.

 

 

시장에서 콩나물을 살 때도 값어치만큼의 양은 당연히 준다. 그러나 덤으로 콩나물이 더

얹히지 않을 때 아낙네들은 금방 섭섭한 눈치를 한다. 파는 이가 두꺼비 같은 손잔등을 쫙

펴서 서너 개라도 더 올려놓아야 아낙네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 간다. 그 덤 역시 국물과 같은 끈끈한 인정의 나눔이리라.

 

그런데 요즈음 우리네 식탁엔 점차 국물이 사라지고 있다. 걸어가면서 아침을 먹고,

차에 흔들리면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 바쁜 사람들이 많이 생겨서인가? 아니면,

개척 시대 미국 이주민의 생활(生活)이 부러워 그것을 흉내 내고 싶어서인가?

즉석 요리, 즉석 식품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다.

 

 

내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생선은 굽고, 닭고기는 튀겨야 맛이 있다고 성화인 것만

보아도 그렇다. 나는 그 반대 입장에 서서 국물이 있는 것으로 입맛을 챙기려 하니,

아내는 늘 지혜롭게 식탁을 꾸려갈 수밖에 없다.

 

기다릴 줄을 모르고, 자기욕심 자기주장이 통할 때까지 고집을 피워 대는 내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혹시 그런 성격이 서구화(西歐化)된 식탁 문화에서 빚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커진다

 

 

 

 

 

            * 어느날 (2008 봄) 의 문학기행에서 .....(맨 앞줄 좌측에서 네번째 <보라색 상의 흰모자 > 가 '문형동' 작가 <윤증고택>

 

 

 

* 수필가 : 문형동

 

 

 

* 어느날 문학 기행에서 왼쪽 가방 멘분, 문형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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