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대통령 이승만 별장 |
이승만 대통령 별장'은 화진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산허리에 박 마리아가 단층 27평으로 신축, 이 전 대통령에게 헌사 했고 이 전 대통령 부부는 수시로 이 곳에서 여름휴가를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용하지 않아 건물이 크게 훼손됐기에 60년대 초 육군에서 철거한 뒤 바로 위쪽 언덕에 58평 규모로 새로 지었다.
해외 독립운동 전개시기, 초대 대통령 취임 이래 6.25전쟁을 치르고 퇴임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기까지 관련 역사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이 전 대통령의 육성과 활동상을 담은 기록필름이 멀티비전으로 상시 상영될 뿐 아니라 이 전 대통령이 사용했던 침실 서재, 두루마기, 석사와 박사 학위증서, 응접실 친필휘호 낚시도구 등 유가족이 기증한 유품이 놓여 있어 그의 애국심과 검소한 생활상을 보여 주고 있다.
* 별장에서 내려다 본 화진포 호수
* 현관에 들어서면 위 사진의 모습을 제일 먼저 보게된다. 지금이야 외국인과 결혼 하는 일이 허다하지만 ,전에는 빅 뉴스에 들어가고도 남을 일일텐데, 더구나 일반 평민도 아니고 독립운동을 하는, 말 그대로 애국지사가
외국인을 아내로 맞은 일은 참으로 대단한 사랑이 아니고는 실현될 수없었을 텐데...
혼자 중얼거려 보았다.
* 친필휘호
* 벽에 걸려있는 사진속의 모습이 다정 해 보여 한 컷 ,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과 결혼해서 정말 행복했을까?
*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
초명(初名)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가난한 선비 이경선의 외아들로 태어나 한문을 배운 이후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 이듬해 8월에 졸업하고 모교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일본인이 명성왕후를 학살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한 사건에 관계되어 지명수배를 당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 후 그리스도교도가 되고 개화사상에 심취해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으며, 〈협성회보 協成會報〉의 주필로 재직 중 날카로운 필치로 정부를 비판했다. 독립협회의 간부로 활동하던 중 정부전복 혐의를 받고 1898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04년 민영환의 감형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그해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가 미국의 대통령 T. D. 루스벨트에게 일본의 한반도 침략 저지를 호소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조지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하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귀국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후진양성에 힘썼다.
1934년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와 결혼했다. 1945년 8·15해방 이후 같은 해 10월에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 총재에 취임했으며 미국의 지지를 얻어 우익세력의 연합조직체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민족통일총본부 총재를 역임하는 등 우익의 지도자로 각광을 받았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5개년 신탁통치에 반대하여 찬탁을 주장하는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세력을 제압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1945년 3월부터 시작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1946년 6월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한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한 이른바 '정읍발언'으로 국내외에 큰 충격을 던졌으며, 자신의 단독정부수립 계획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호소했다.
1948년 5·10선거 이후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며, 7월 대통령중심제로 헌법이 제정·공포되어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제1공화국). 철저한 친미·반공주의자로 공산주의를 분쇄하는 데 앞장서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를 다졌으며, 공공연히 북진발언을 하기도 했다. 6·25전쟁 중 1952년 부산의 국회에서 재선이 어렵게 되자 헌법을 대통령직선제로 개정하여(이른바 발췌개헌) 제2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 방식에 반발, 국제연합(UN)군의 동의 없이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1954년 초대 대통령에 대한 연임제한을 철폐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사사오입개헌을 강행했고,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8년 자신을 반대하는 사회정치적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해 야당과의 첨예한 정치파동을 낳기도 했다.
1960년 3월 15일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는 대대적 부정선거로 그는 비록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이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원인이 되어 4·19혁명이 일어나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후 하와이로 망명했으며, 망명생활 중 사망했다.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있다.
* 제1공화국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으며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으로 나라의 초석을 다지고 국력을 신장 시키는데 힘썼음은 누구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고로 그를 공공연히 애국자란 말을 붙여도 이의를 제기 할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도 끝내는 망명길에 올라야했고 또 다른 대통령들의 <박정희, 전두환 노무현등 > 끝 마감 생각해 보면 참으로 시사하는 점이 많다. 대통령이란 이름만으로도 자자손손 가문의 영광이며 역사에 남을 일인데 왜 그토록 욕심을 부려 그렇게 인생을 마감해야했는지……. 권력자의 최후를 생각해 보게 된다.
* 남북의 최고 권력자가 화진포를 별장지로 택한 것은 물오리 떼가 노니는 한적한 호수, 병풍처럼 호수를 감싸고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 끝없이 펼쳐진 해안선과 고운 백사장 등 천혜의 절경 때문 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지금은 길이 닦이고 다리가 놓여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당시 화진포 일대는 일반인들이 출입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완벽한 보안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 이승만 대통령 별장은 호수를 바라보고 있고 김인성 별장은 바다를 바라보고 직선거리3 km 간격으로 위치해 있으며 이기붕 별장은 그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서로 상극인 원수들이 한자리에 별장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이러니 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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