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상당산성 먹거리 한옥 마을에서

목향 2011. 9. 27. 15:13

 

상당산성 먹거리 한옥 마을에서

 

 

엊그제 토요일 (2011.9.24) 해거름에 상단산성 한옥마을 상당집을 찾았다.

날씨도 쾌청했지만 갑자기 비지찌개 생각이 나서 동생내외를 불러 같이 다녀왔다.

아마도 청주 사람치고 이 집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본다.

이 식당엔 비지찌개가 주 메뉴이기에 이 나이에도 어머니 손맛이 생각나면 들르는 곳이다.

값도 비싸지 않지만 너무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때론 순번을 기다려야하는 일이 흠이다.

 

보통은 산성의 남문이나 서문, 또는 산성을 한 바퀴 도는 것이 목적지이지만,

이날은 해거름인데다 특히 마을 앞 커다란 연못의 산그늘에 매력을 느껴 연못 주변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가을의 정취를 느꼈다.

 

 

 

 

 

 

짐도 사람도 없는 나룻배 한 척이 퍽 쓸쓸해 보인다.

무리중의 고독이라할까?

 

 

 남편과 제부가 한가 한 여유의 시간을  갖는 듯

 

 

 

 

 

한옥마을 중심부, 참 사람도 많고 차도 많다.

제부가 차 댈 곳을 찾느라고  한참이나 헤맸다.

 

 

 거꾸로 선 연못의 산그늘이 아름답다.

 

 

 

 

콩비지찌게로 유명한 상당집

 

상당산성 /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조선시대 산성의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곳이 상당산성(사적 제212호)이다.

해발 491m인 상당산의 능선을 따라 둘레 4.2km, 높이 4-5m의 성곽을 쌓아 그 위를 걷는 동안 하늘이 가깝게 느껴진다. 

 

 

산성 남문

 

 

 

 

 

김시습 시비

 

 

 

 

지난 어느날 시비앞에서 동료들과

 

시를 해설하면?

 

산성에서 / 매월당 김시습 

 

꽃다운 풀 향기 신발에 스며들고

활짝 갠 풍광 싱그럽기도 하여라.

 

들꽃마다 벌이와 꽃술 따 물었고

살진 고사리 배간 뒤라 더욱 향긋해.

 

웅장도 하여라. 아득히 펼쳐진 산하

의기도 드높구나, 산성마루 높이 오르니

날이 저문들 대수랴, 보고 또 본다네.

내일이면 곧 남방의 나그네 일터이니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전국을 유랑하다가 산성을 돌아보고

남긴 제영시가 바로 '산성에서'인데

시비는 상당산성 정화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2000년 12월 청주시가 청주문인협회와 함께 세웠다.

 

 

 

 

성곽에 올라 한 컷

저 뒤로 산성 서문이 보인다.

 

산성에 오르면 청주 도심지의 모습이 그대로 눈에 들어오고

 

들녘의 풍요로움도 함께 누릴 수 있다. 

 

김시습은 누구?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은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았고

3세에 능히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5세에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기도 했다.

 나아가 당시의 석학인 이계전(李季甸)·김반(金泮)·윤상(尹祥)에게서 수학하여

유교적 소양을 쌓기도 했다.

 

그의 이름인 시습(時習)도 〈논어 論語〉 학이편(學而篇)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과거준비로 삼각산 중흥사(三角山 中興士)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는 관서·관동·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 每月堂詩四遊錄〉에 그때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南山) 금오산(金鰲山)에서

성리학(性理學)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37세에 서울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직접 짓고 환속하는 한편 결혼도 했다.

벼슬길로 나아갈 의도를 갖기도 했으나 현실의 모순에 불만을 품고 다시 관동지방으로 은둔,

방랑을 하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5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