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땅을 밟으며 (2)/ 꿈에도 그리는 고향 마을
(충북 제천시 덕산면 성내리)
위의 연못은 <생계미 연못>이라고 불렀는데
그렇게 그리던 연못을 40여년 지나 찾아드니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위 글 제목에 <꿈에도 그리던> 이란 말의 실제 한 장면이기도 한데,
유년시절 그렇게 넑고 크고 맑은 물이 흐르던 곳,
앞산의 산그늘이 이 연못에 거꾸로 드리우면 참으로 아름다웠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참이나 서성이면서 살펴보니 연못의 거의는 농경지로 메워져 있고
물꼬초차 막혀있어 지금엔 썩은 물구덩이에 불과했다.
어린시절 동네 청년들이 이 연못에서 고기를 잡는 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뒷 집 친구 남희와 100m달리기로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던 곳이다.
몇개의 양동이마다 가득찼던 펄펄 뛰던 금, 은빛 물고기들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
성장해서는 마음이 울적한 날, 어김없이 찾아들어 주변 한 바퀴 돌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던 곳이다.
차라리 지금에 오지않았다면 그 옛날의 모습을 그냥 간직하고 살터인데,
일부러 힘들여 찾아왔는데 참으로 실망 스럽다.
옛 집터
우리가 살던 집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무슨 빵, 차 카페가 생긴듯하다.
그냥 멀거니 서서 뒷산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향은 어머니 품속이고 그 자체다. 옛집의 그리운 모습이 자꾸 떠올려진다.
옛 집터!!! 가족들이 완전히 고향을 등진지 얼핏 헤아려보니
약 45,6년, 나는 직장 관계로 홀로 2,3년 더 머물렀지만, 그래도 40여년의 세월이 지난 터이다.
그간 두세 번 정도 잠시간 둘러보긴 했어도 격세지감이다.
어쩐 일인지 그때마다 건물도 주인도 바뀐 터이다.
" 그래. 6.25 전 이 터엔 참으로 커다란 집이 기세등등하게 자라잡고 있었지.
방이 열 개가 넘었고 안채, 사랑채, 문간채 등, 대문도 두 개나 되었지."
마당가운데 우물 (두레박)이 있었고 그 옆으로 꽤 큰 화단,
뒤 뜰 사과나무 옆으로 어머니의 손때 묻은 그 커다란 장독대의 독들, 반질반질한 항아리들!
옛날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재산의 큰 손실은 토지개혁과 6.25 사변에 기인되지만, ‘상처가 망처라.’ 했든가.
갑작스런 어머니의 별세를 기점으로 가세는 차차 기울어갔다.
우리 마을의 뒷동산
바로 저 오른쪽 무성한 나무 밑으로 사흘갈이 (소 쟁기로 사흘을 갈아야 되기에 붙여진 이름 )
우리 밭이 있었다.
고추, 오이 , 깨, 보리, 가지, 목화 등등 우리집 먹거리의 보고이기도 했는데,
가세가 기울자 그 밭이 육간집 (정육점) 신씨네로 팔려갔었다.
지금에 듣고 보니 그집안도 가세가 많이 기울어지자 자손들 조차 어디론가 떠나갔다고.
세상은 돌고 도는 모양이다. 지금의 땅 주인은 누굴까?
전에는 초등학교만 자리 했는데
(당시는 이 마을에 중학교가 없었다. 중학교에 진학 하려면 충주나 제천으로 유학을 해야했다.)
나도 충주에 나와 충주 여자중학교에 다녔다.
아마도 지금엔 중학교도 생겨나 겸해 사용하나보다.
나의 모교 덕산초등학교
나의 모교이면서 젊은 날 근무했던 잊을 수 없는 학교다.
그 당시는 단층이었는데 그사이 2층으로 변해 있었다.
나 뿐만아니라 , 아버지, 숙부님, 고모님, 나의 형제들이 다닌학교다.
학교 울타리
그렇게 빽빽하게 줄지어 서있던 측백나무 울타리는 어디로 가고
왜 ? 이렇게 변해 있을까?
도무지 정이가지 않는다.
그 울타리 주변에서 친구들과 장난치고 놀던 생각이 났다.
당시 여름철이면 운동장 풀뽑기 작업에 진저리 쳤는데 오늘의 운동장은 전혀 잡풀이 없어 보인다.
학교앞 도로에서 월롱리로 들어서면서 바라본 월악산 영봉
가을은 깊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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