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10월 13일. 가만히 바쁜날들

목향 2009. 4. 5. 14:55

제목 : 2003. 10월 13일. 가만히 바쁜날들


사람들이 일어나 불을 켜기 시작하는 아침녘
나는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우며
사람들이 커튼을 닫을 때
나는 커튼을 열었다가
사람들이 커튼을 올릴 때 나의 커튼은 내려진다.

아주 특별한 일이거나
반드시, 꼭, 필히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면
집 밖을 나가는 일도
사람을 만나는 일도 하지 않는다.

휴대폰을 꼭 챙길 이유도 없어졌다.
전화벨이 울리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 전화를 걸어온다해도
받지 않기때문에 이미 전화가 가진 기능은 상실된 상태로
꽤 오랜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이건 누가봐도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형태는 아니었다.
나는, 내가 왜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들 속에 파묻혀 지냈고
그러다보니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찾아내며
생각들을 끊임없이 하는 일 때문에
다른 일을 채 할 겨를도 없이 바빠졌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는데
나는 왜 이리도 바쁘단 말인가.....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나는 나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을 찾는 일조차도 하고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


그리고
지인 에게서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지내?" 언제나 그렇듯 전화기 너머의 질문은 고만고만했다.
"그냥... 가만히 있어.... '분당 가마니'라고 들어는 봤는가?"
"후후후후..." 수화기 너머에서 알 것 같다는 의미의 웃음이 전해졌다.

지인은 요즘 자신이 하고 있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했고
나는 역시 가만히 듣기만 했다.
내게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도 내 비추는 지인의 말에 나는 뜬금없다고
여겨질만한 말을 했다.
"예전에는 말야.... 무슨 일이든 찾아서라도 하지 않으면 안달이 날 정도로
일 중독 증세를 보였었다고 생각해. 그런데 지금은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휴식중독증'에 걸린 것 같아."
그러자 지인에게서 의외의 반응이 나타났다.
" 야, 난 길은정이 아무일도 하고싶지 않다고 말하는게 왜 그렇게 이쁘게 들리니?
그건 뭔가... 무척 안정되고... 뭐랄까... 달리기 선수가 준비자세를 취하고 있는
상태같은?.... 뭔가 커다란 에너지가 만들어졌다는 느낌으로 들리는데?"

"아니야! 난 아무것도 아니라구!
난 그저 무엇이 될지 모르는 통나무 인 것같아.
그래... 어쩌면 새롭게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불러 모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게 사실이야. 내가 너무나 무기력하거든.
그 통나무가 장농이 될지, 불씨를 키우는 숯이 될지.
아니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썩은 나무로 그냥 버려질지.....
그 휴식중독이 아직은 어떤 에너지를 만들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어
어쨌든 난 지금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다는 거야 . 그리고 지금 난 아무것도 아니지"

"히야! 장농과 썩은나무로 그렇게 오도시를 치나 그래? 작품 나오겠는데?"
_오도시: 방송가에서 쓰는 일본식 표현_
나의 말이 어느 정도 비관적이었음에도 지인의 이해는 상당히 낙관적이었다.


짧은 전화통화를 끝내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텅 빈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보니 내 마음도 내가 내려다보는 거리와 같았다.
분노나 미움같은 감정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투쟁의 의지도 애당초 없었으며
특정한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도 너무나 오래도록 없었다.
이토록 무심한
텅 빈 거리처럼 고독하고 황량한 가슴이
어쩌면 퍽 낙관적 상황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나는
이 염증나는 역겨운 현실과 세상에 대해 가지고있는 비관적 생각 또한 버리지 못했다.

일 중독에 빠져있던 내가
휴식중독이라고 느낄만큼,  언제까지라도 가만히 있고싶은 이 감정은 과연
비관적인 것일까
낙관적인 것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며 가만히 있는 일이 왜 이리 바쁘단 말인가......
다음에 혹여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을 일이 생긴다면
나는 어떻게 지내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바꿔야 할 것 같다.
" 가만히 있는데, 무진장 바쁘게 지내" 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