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8월19일. 순수를 그리워하며

목향 2009. 4. 5. 14:54

제목 : 2003. 8월19일. 순수를 그리워하며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것은
며칠동안 언니 부부가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언니는 여행지에서도 전화를 걸어왔다.
"네가 걱정되서......"
"나 잘 지내고 있으니까, 내 걱정말고 여행지에서 최대한 즐겁게 지내.
일상을 떠난 즐거워야할 여행에서 내 걱정하고 있으면 되겠어?
모두 다 잊고 최대한 즐겁게 보내다 안전하게만 돌아와 주면 돼, 언니"
하고 내가 말했다.

사실은 나도 부부동반 여행을 떠난 언니를 걱정하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모처럼 의미있는 여행인데 비가 내리니 고생이 많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지만
내가 걱정한다는 것을 알면 언니 마음이 무거워질까봐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언니는 아직도 소녀같은 심성을 지녔고  적극적이며 책임감이 강하고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약속했으면 그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언니의 가정은 단란하고
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내가 언니의 반만 닮았어도...."
나는 언니의 문학소녀같은 청순함과 순수함을 무척 좋아한다.
그렇다고해서 언니에겐 평탄한 일만 계속되었던 것은 절대 아니다.
힘겨운 고비를 현명하게 넘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매는
내년에는 기필코 '국토순례 대장정'에 참여해보자고 약속했다.
물론 나는 신체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고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숱한 어려움과 고난이 따르겠지만
"할 수 있어! 해 볼거야!" 하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약속했고
하이파이브를 했었다.
장애와 고통.불면증을 가지고 불편한 장소에서 잠을 자야하고
15일 이상을 행군하며 목적지까지 도달해야 하는 일.
우선 나는 나 자신을 테스트하고 도전해보고 싶었다.
내년 여름이 무척 기대된다.

오늘도 신문을 들여놓기 위해 현관문을 잠깐 열었던 것 외에는
현관 근처에도 가지 않은 채, 홀로 여행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줄거리는 언니를 통해 전해들었던 드라마 '여름향기'를 오늘은
볼 수 있었다.
우연의 남발과, 심장이식수술을 받은 환자로 나오는 여주인공의
가슴이 깊게 파진 의상을 볼 때마다,
'저럴 순 없어!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헛점이 너무 많아" 라고 생각하며
답답해하기도 했다.
실제 심장수술을 받은 환자의 흉터는
목 바로 아래부분, 쇄골 사이부터 절개되어 봉합하기때문에
그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가슴이 깊이 파인 옷은 입을 수가 없다.
그렇게 입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수술자국이 선명하게 보여야 한다.
드라마속 주인공의 노출이 심한 의상으로도 심장수술을 했다는 것을
남자 주인공이 눈치채지 못한 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말이 안되는 극본인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미처 생각지 못했거나 피디역시 환자가 되어 본 경험이
없었을테고 의상을 담당하는 코디네이터 역시 심장수술을 한 환자의
흉터가 어떻게 자리하는지조차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연기자 조차도 그런
작은 부분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촬영스탭 누구도 심장수술환자의 고통은 나몰라라 하며
그저 환상적이고 운명적이며 비극적이기도한 상황설정에만 치우쳐 있었을 것이다.

정말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트 배경과 연기자의 의상을 맞추는 섬세함도 필요하다.
여름향기는 비교적 훌륭하게 배경에 따르는 의상과 소품의 색깔까지
세심하게 신경쓰고 있는 노력의 흔적이 충분히 보이지만
단 한가지, 아주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여주인공의 의상은 각별히 신경써야 할 부분이었다.
모든 의상이 쇄골을 드러내지 않는 네크라인이라든가
언제나 목까지 올라오는 의상만을 입었어야 그 모든 상황이 이해되는 것이다.

나는 20대 중반에 여고동창생이 심장수술을 한 후 병실에누워있을 때,
브이넥으로 파여진 환자복 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지독한 수술자국. 흉터를
보았었다.
심장에 암이 생겨 수술을 했던 여고동창생은 한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 흉터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또 다른 심장수술 환자는 내게 전화를 걸어와, 그 드라마를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도 했다.
"저건 말도 안돼! 말도 안돼!" 하며 울기도 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실제 환자의 아픔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에 촉각을 곤두세울 뿐이다.
아픔을, 고통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 '여름향기'가 가진 몇가지의 단점과 오류를 발견하고
가슴 답답해 하면서도
그 안에서 소중하게 끄집어내고 싶은 것은 바로
'순수함' 이다.

타인을 배려하기에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자기 감정을 숨기며 괴로워하고
조건이나 안정된 생활따위의 환경에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사랑을 하며
새롭게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몰래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손한번 잡는 일도 조심스럽게 순수한 사랑을 지켜간다는 것.
서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내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것.
이런 순수함이 드라마를 이끌어 가기에
'여름향기'는 내 20대의 고귀한, 단 한번의 첫사랑의 순수를 떠올리게 해
가슴아프게도 하지만  아름답기도 하다.

온통 불륜을 소재로 하거나 조건을 따지는 결혼등의 대사로 이어지는
여타 드라마와 차별되는 '순수함'과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눈을 사로잡아서 오늘 나는 모처럼 드라마 한편을 끝까지 보았다.

그렇게 순수한 사랑이 드라마에서뿐만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도 더 많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이전에 또 한편의 백조*** 라는 일일연속극을 보았다.
나는 드라마속의 대사를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의 며느리감을 고르는 내용중
두 중년부인이 나누는 대사였다.
"남자들은요. 여자들을 많이 만나보고 연애경험이 많아야 요조숙녀랑 결혼하더라구요"
"그리구요. 그래야 바람도 들키지 않고 잘 핀대요"
이 대사는 그 중년부인들의 아들을 두고 하는 대사였다.

여성이라는 존재. 엄마라는 존재는 참으로 모순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적절히 나타내주는 대사였다.

입장을 바꿔, 아들의 엄마가 청춘이던 시절,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다닌다면 그것이 얼마나 자신에게는 고통일 것이란 말인가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용서하지 못해 파경에 이르는 부부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소연 할 지도 모른다.
"말도 마. 내가 참고 용서하며 살아온 얘기 책으로 쓰자면 10권도 넘을거야"
라고 말이다.

그런데 입장이 바뀌어 아들의 어머니가 되었을 때는
아들이 며느리에게 들키지 않게 바람을 피우는 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
이 얼마나 모순된 이야기란 말인가!
같은 여자이면서, 자신은 남편의 불륜을 용서하지 못할 거면서
남의 집 식구인 며느리는 아들의 외도도 참아줘야 한다는 이런 비논리....
며느리가 겪을 고통은 전혀 생각지 않는 이기적인 생각이 아니던가.

남자가 불륜을 저지르면 그럴수도 있는 것이고
여자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말로 단호하게 내치는 이는
대부분이 같은 여자인 시어머니일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남성우월주의와 죄책감없이 바람을 피우는 남자들도 좀더 양심적으로
변해야 하지만
그보다 우선 변해야 할 것은 여성들의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말인가.

결혼식에서 "오직 이 한사람만을 사랑하겠습니까?"라는 주례의 말에
자신있게 대답해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바람을 피울바에야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지금 이 사회가 얼마나 타락해가고 있는지
얼만큼 망가지고 있는지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깊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래도 세상 어느 부분에는 순수함과 정직함이 큰 기둥으로 꿋꿋하게 서있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우선 나의 언니가 그렇고 나도(?) 그렇다.

나는 순수와 정직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

비가 내리는 창밖.
많은 비가 내리면 비피해를 입을 분들이 계실까봐 걱정스럽지만
지금 내리는 비로는 가슴이 간지럽다.
비라도 철철 쏟아져서 오염된 세상을 깨끗하게 씻어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