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8월 11일. 차라리 모르자.

목향 2009. 3. 31. 17:16
제목 : 2003. 8월 11일. 차라리 모르자.

아무것도 모르고
생각도 없이 사는 것이 부러운 날이었다.
바람은 선들하게 느껴졌고
지구 이상기온이 어떻고 저떻고
과학적 이론을 들먹이며 연구한 기상정보도 모르고 싶었다.
그저 자연의 바람. 빗소리. 태양이 원시적으로 느껴지길 바랐다.
그저 그랬다.

친구와의 전화통화중 인터넷 사용 기술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그런 건 어떻게 하는 거야? 사진도 올리고 재미있는 그림도 만들고...."
나는 그저 감탄하며 말한 내용을, 친구는 진지하게 들었던 모양이었다.
사진올리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

이걸 어쩌나........

"사실, 난 말야..... 인터넷에 대해서 더 이상 알고 싶지가 않아......"
내가 말했다.
친구는 내 말 뜻을 금방 이해했고
그리고 웃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더 좋은 일들이 있다.
차라리 겪지 않았다면 더 좋은 일들이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싶었다.
뉴스도 보고싶지 않았고
내일 날씨가 어떨지 따위도 알고 싶지 않았다.
지금 현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때가 되면 아침이 밝아올 것이고
그럼 또 다시 나는 약을 먹어야 한다는 것.
신문이 오고 언니가 올 것이라는 것등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차라리 몰랐어도 좋을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나는 '페터 빅셀'에게 경의로움을 느낀다.

정말 이 즈음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알고싶지 않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화는 화를 부르고
파장과 혼돈. 카오스.....
더 이상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도대체 '무얼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은 거냐'고 물어보는 이가 있다면
과연 내가 '무엇을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은 지' 알아봐야 할 것 같다.
페터 빅셀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