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8월 8일. 은정이의 하루

목향 2009. 3. 31. 17:15

제목 : 2003. 8월 8일. 은정이의 하루

"내일은 뉴욕치즈케잌 사올게"
어제 마주 앉은 식탁에서 언니가 말했었다.
나는 '언니가 치즈케잌이 먹고싶은 가 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치즈케잌은 겨울에 먹을 때 제 맛이 나지 않아?
차갑게 굳은 치즈케잌 한조각을 먹고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을 마셨을 때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치즈의 새콤하고 고소한 그 맛! 음... 예술적이지...."
나는 눈동자를 위쪽으로 치켜올리며 그 맛과 겨울 풍경을 떠올리기만 했었다.

언니가 가고 한참이 지난 밤시간.
갑자기 머리속을 스쳐 지나가는 불빛같은 것이 느껴졌었다.
"케잌?  갑자기 웬 케잌? 혹시 내 생일케잌? 아뿔싸....."
그제서야 내 생일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혹시 내 생일케잌을 사려는 거라면 사지 마. 그런게 뭐 필요해.
정 형식이 필요하다면, 냉장고에 쵸코파이 한두개 있으니까 그것으로 생일케잌을
대신하지 뭐. 쵸코파이에 초 몇개 꽂으면 되지 뭐. 안그래?"
그러나 이런 나의 간절한 바람은 이미 늦어버렸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벌써 샀어"
이 짧은 대답에 나는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간신문을 들여 읽고
새로운 아침이 훤하게 밝아오는 것을, 창가에 서서 바라보았다.

언니가 찾아왔고
커피향이 코끝에 와 기분좋게 솜털을 건드렸다.
뉴욕치즈케잌에 초를 꽂아 불을 밝히고
생일축하노래를 빠른 템포로 단숨에 불렀다.
와~~ 박수를 치고 촛불을 끄고  유아원 어린이의 소꿉놀이 같은 생일파티가
가볍게 끝났다.
언니와 단 둘이 마주앉아 그렇게 아침을 맞았다.

올해 언니와 함께 '국토순례대장정'에 참여해보자고 약속하고 계획했었는데
학생만 참여가 가능하다기에 안타깝게 포기해야만 했던 이야기를 하며 아쉬워했고
그렇다면 해병대 훈련캠프에 참여해볼까? 같은 의견도 나눴다.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

그리고 혼자 있길 원했다.
'레드 바이올린'이란 영화를 비디오로 보았고
아무데도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은정이의 하루가 갔다.

오늘이 내 생일이었다는 것을 자꾸만 잊었다.
하긴 최근 나는 건망증(?) 증세를 자주 보인다.
잘 알고있던 단어를 까맣게 잊기도 하고 해야 할 일을 깜박 잊기도 한다.
금방 기억하고 있던 것을, 거실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에 잊기도 한다.
내가 무엇때문에 이 방에 들어왔지? 캄캄해하며 제자리 걸음을 하기도 한다.
최근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선 자주 잊으면서
아주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일들은 어찌하여 절대 잊히지 않고
대사와 환경과 상황과 옷차림새와 표정들까지
그리도 생생하게 기억속에 머무는 것인지.....
차라리 너무 좋은 기억력에 원망의 마음을 품게 될 정도다.
선택적 부분 기억 상실증에라도 걸렸으면 하고 날마다 바람을 갖는다.

그저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조용한 하루가 갔다.
우울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만큼 마음은 가볍게 평화로와졌고
나의 모든 가족들(?)께 감사하는 마음이다.
아주 조용하게 지나간 하루의 끝에서
나는 새어나올 듯 말듯 조그마한 소리로 한 소절의 노래를 부른다.

"Happy birthday to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