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8월 4일. 웃음의 의미

목향 2009. 3. 31. 17:13

제목 : 2003. 8월 4일. 웃음의 의미

전반적으로 내 감정은 몹시 우울한 상태를 이어갔다.
그런 우울함이 지속되는 것을 좀 더 세부적으로 관찰해보자면
우울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좀 더 짙은 우울과 조금은 가벼운 우울. 몹시 절망적인 우울.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우울등
그 감정의 종류는 표현이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게 나타나고 반복되며 흐름을 탔다.

그렇다고해도 내 감정을 내가 느끼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은 없다.
이웃과 마주치면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해야하고
그렇게 웃어야 하는 것은 어느상황에서건, 어디를 가서건 지어야하는 표정이다.

매일 나의 감정상태를 살피는 언니에게조차 마음놓고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언니가 마음 아파할까봐 걱정이 되기때문이다.
언니는 내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 그런 언니에게 만약 짜증이라도 내게 된다면
내 마음은 아마 더욱 우울해질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웃는다.
언니와 마주하고 나누는 대화중 가장 먼저 알리는 것은 내 감정상태다.
"오늘은 무척 우울해"
"오늘은 그래도 어제보단 조금 좋아진 편이야"
"허벅지 부위의 임파선만 말썽을 부리더니 이젠 왼쪽 턱 부위가 속썩이며 아프네"
"아! 어지러워"
이런 모든 종류의 얘기를 웃으며 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나를 관찰하며 보고서를 읽듯이 표현되는 것이다.
우울하고 아픈 것은 내 감정이고 나의 통증일 뿐,
언니가 내게 통증을 주는 것은 아니기에 언니에게 짜증을 부릴 이유가 없다.
언니와 나는 무척 사이좋은 자매로 매일 웃으며 만나고 헤어지지만
내 우울과 통증은 내 안에서 파도타기를 하며 나를 힘겹게 하고 있다.

이렇게 나의 감정상태나 아픔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있는 언니에게도 웃음을 보이는데
전혀 내 상태를 알지 못하는 이웃이라던가
상점 주인. 오가다 마주치는 사람들...... 방송카메라.
이들에게 찡그린 얼굴을 하거나 우울한 얼굴을 드러내는 일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들이 내게 잘못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동대문에서 뺨맞고 종로에서 화풀이 한다"는 속담의
실천이 될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웃을 수 밖에 없다.

우울함에도 여러종류가 있는 것처럼
나의 웃음에도 수많은 감정이 들어있다는 걸 남들은 모를 것이다.
나는 매일 웃는다.
말을 할 때마다 저절로 웃음을 띈 얼굴이 되기도 한다.
보는 사람은 모두 같은 웃음으로 단순하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아주 다양한 감정들이 섞여나온다.
아주 화가나도 웃고
몹시 슬퍼도 웃고
지독히 아파도 웃고
재미있어서 웃기도 한다.

웃음은 그저 단순한 하나의 감정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슬픔 분노 기쁨 자책 불안 희망 등등의 감정이 웃음안에 있을 것이다.
너무나 행복한 순간엔 가슴이 울컥하며 눈물이 먼저 나오고
이후 어색해하며 웃음이 뒤에 오는 것은 나만 느껴본 감정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웃음에는 어느정도 가식이 포함되어 있다.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교사라는 직업도 그렇게 웃어야만 하는 의무가
있는 직업인 셈이다.
부부싸음하고 출근했다고, 교장선생님께 꾸중들었다고 기분이 나쁘다해서
교실에 돌아와 애꿎은 학생들한테 호통을 치거나
자습을 시키고 수업에 지장을 준다면 교사로서의 프로근성이 부족하다며 비난할 것이다.
장사하는 사람이 손님에게 불친절했다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가만히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감정을 제어하는데 가장 좋은 수단은 웃음일 것이다.
사회생활속에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부딪히자면
어느정도의 가식적인 웃음이 누구에게나 필요할텐데
연예인에게는 더욱 많은 가식이 웃음속에 있을 수 밖에 없다.

나는 그런 종류의 웃음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남을 웃게 만드는 직업인 개그맨도 우울증을 앓는다던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지금 우리 사는 세상.
찡그리고 앓는 소리보다 가식적으로 느껴질지 몰라도 웃는 모습이 좋은 건 당연한 이치다.
그 웃음에는 남을 위한 배려가 깊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

혼자 있는 시간.
깊은 우울이 머물고 있다.
말없이 창밖만 내다보며 석고상이 되었다.
오래도록 움직임이 없는 내 다리를 '코코샤넬'양이 앞발로 톡톡 건드렸다.
까만 유리 단추같은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이든 친구에게
나는 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웃고 싶어서 웃은 것은 아니었다.
"걱정 마. 너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야. 내가 많이 우울해서 그런거야.
미안해 코코. "
내 우울함때문에 눈치를 보고있는 강아지의 감정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의
배려때문이었다.
'코코샤넬'양은 마음이 놓였는지 제 집으로 들어갔다.
오늘 나는 몹시 우울했지만
그만큼 웃기도 했다.
전화를 받을 때 밝은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어쩌면 아주 가식적인 웃음이었다.

그래도 난 가식적인 웃음이 차라리 좋다.

가식적으로 자주 흘리는 눈물보다는.....

가식적인 눈물은 남을 배려하기에 흘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이용하기에 쓰여지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