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7월 21일. 억울함의에피소드

목향 2009. 3. 31. 17:12

제목 : 2003. 7월 21일. 억울함의에피소드

벌써 10여년이 훨씬 넘은 과거의 일이다.
오토매틱 트랜스미션 자동차가 나오기 훨씬 전의 일이니
수동으로 기어를 작동하여 운전을 하는 소위 '스틱 자동차'의 시기였다.
나는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있었고
약간 오르막 경사가 있는 교차로에서 신호대기중으로 정차해 있었다.
내 바로 앞에는 역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자동차 한 대가 더 있었다.
그런데.....
그 앞차 운전자의 자세가 무엇을 찾는 듯, 옆으로 기울어지는 듯 한 모습이 보이더니
갑자기 앞차의 브레이크가 풀리며 슬금슬금 내 차를 향해 뒤로 밀려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때는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고
자동차의 유리창은 모두 닫힌 상태였다.
나는 깜짝 놀라, 앞차가 뒤로 밀리고 있다는 신호로 클랙션을 마구 눌러댔다.
그럼에도 내 앞에 서있던 자동차는 순식간에 뒤로 밀려 내려와
내 차의 앞 범퍼를 '쿵'하고 들이받고 섰다.

나는 '범퍼야 원래 부딪힘에서 완충작용을 하는 역할을 하는 부분이니, 그 정도 가지고
실랑이를 하지 말자' 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실수를 용서하고 있었다.

앞차의 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내려 내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그 남자가 내게 "미안하다" 고 말하려 한다고 생각했고 당연히 그랬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자동차 유리를 내리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그냥 가셔도 좋아요. 그냥 가세요"
그때 그남자가 말했다.
"뭐요!"
그 소리는 절대 미안한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 아닌 큰 소리였다.
나는 순간 당황했고 마침 신호등엔 녹색불이 켜졌다.
"그냥 가시라구요. 그냥 가셔도 괜찮다구요" 나는 역시 웃으며 말했다.
뒤에 줄지어 기다리던 자동차들이 일제히 빵빵 거리며 클랙션을 눌러댔고
그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무척 화가 났다는 듯 입고 있던 검은 색 양복쟈켓을 힘껏 뒤로 밀어 젖혀 찬바람을 내며 돌아서
자신의 자동차를 향해 가며 크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에이~ 씨* "
그 남자의 말은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앞차가 뒤로 밀려내려와, 가만히 서있던 내 차를 받았는데.....
분명히 피해자는 나고, 가해자는 앞차인데....
그리고 나는 '범퍼를 물어내라는' 등의 실랑이는 생각도 하지 않고 무조건 용서를
결정하고 있었는데.....

'이건 뭔가 잘못 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찰나,
앞차는 기어를 넣고 출발을 했다.
시시비비를 가릴 기회조차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더욱 황당했던 것은 그 차의 뒷자리에 타고 있던 두명의 남자들이
뒷 유리창을 통해 손가락질을 내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저런, 저런, 나쁜 여자가 있나. 이번엔 우리가 봐준다. 운전 똑바로 해!"의
의미를 담은 바디랭귀지였다.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나.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로 뒤로 밀려 내 차를 들이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의 자동차를 들이 받았지만 자신들이 나를 봐주고 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떠난 것이었다.
그 순간과 그 이후 집에 돌아온 뒤에도 계속 느껴지는 황당함과 억울함이란
작은 유리병속에 갖힌 파리의 그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나는 당시 "그쪽이 뒤로 밀려 내려와서 제가 클랙션을 계속 울려댔잖아요.
그런데도 못 들으시고 뒤로 밀려 기어이 제 차를 들이 받으셨네요.
하지만 뭐 이 정도쯤은 괜찮을테니까 그냥 가세요. 잘못을 묻지 않을게요.
괜찮습니다. 그냥 가세요" 라고
상황을 설명하지 않고 나 혼자 용서했던 나 자신을 탓해야했다.

나는 '그들이 당연히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으리라'고 믿었던 나를 탓해야했다.

내가 이러이러한 피해를 입었노라 말하지 않았더니 가해차량은 잘못을 알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설명을 했었다해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서 시시비비를 가렸을 경우, 상대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한
상황은 내게 완전하게 불리했다.
나는 혼자였고 여자였으며, 가해차량의 탑승자는 남녀가 함께였고 여러명이었다.
그들이 명백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한,
어쩌면 나는 경찰의 도움을 받는 지경까지 갔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시절 억울했던 자그마한 교통사고와
억울한 나를 향해 적반하장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떠나던 자동차의 뒷모습을
최근에 자주 떠올리곤 한다.

살아가는 일에는 '론도형식'의 음악처럼
비슷한 테마가 반복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사소한 일에도 억울함이 느껴지는데
자신이 명백한 잘못을 저질러 놓고
오히려 내게 잘못을 전가하며 큰 소리를 치는 엄청난 일들을 또 겪었을 땐
작은 유리병에 갖힌 파리의 답답함이 아니라
살아있는 채로 관 속에 갖혀 외부에서 못질을 해놓은 관 뚜껑을 긁어대는 것과 같은
억울함을 느꼈었다.

지금은 미움도 분노도 사라졌지만 억울함은 남아있다.
억장 무너지는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는 날이 내게도 오기를 기다리며
마음의 평화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비를 내렸다, 멈췄다 하는 오늘 날씨와는 반대로
평화로운 이 마음이 지속되길 바라는 날,
빙긋이 웃으며 오래전의 기억을
회상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