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7월 20일. 한 걸음의 도전

목향 2009. 3. 31. 17:10

제목 : 2003. 7월 20일. 한 걸음의 도전

나는 요즘 뉴스를 보는 일이 두렵다.
매일 같이 일어나는 엄청난 사건 사고들을 보며
"세상이 미쳐가는 것 같아" 하며 답답해하고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정도다.

우선, 어떻게 방송사가 여럿 있는데도 뉴스의 내용은 모두 똑같을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자료화면마저 똑 같아서 내가 어느 채널의 뉴스를 보고 있는지조차
헛갈릴 정도란 얘기다.
이것은 어딘가 중심적인 기관에서 뉴스내용을 조정하고 지시하며
자료화면조차 각 방송사에 제공하고 있다는 뜻 아니던가.
각 방송사의 취재기자들은 도대체 무얼 취재하고 있단 말일까.
각 방송사에 소속된 기자들의 신분만 다를 뿐 설명이 거의 똑같은데,
그렇다면 무엇하러 같은 시간대, 같은 내용의 뉴스를 내보내며 전파낭비를 하고있는 것인지
답답해지곤 한다.
방송일을 했던 나는
80년 정권에 의해  강제로 TBC 가 KBS로 통폐합되고
언론통제가 어떤 정도로 이루어졌었는지 조금은 알고있다.
5공화국 시절, 방송진행자들은 '대머리'라는 단어와 '주걱턱'이라는 단어를 써서는 안되는 정도였다.

지금이야 각종 오락프로그램에서 방송에 적합치 않은 언어들까지 마구 사용해도
용납이 되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고 넘어지고 주저앉고, 오히려 도가 지나치다 싶게
자유분방해져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듯 포장되어 있지만
뉴스를 볼 때면 나는 항상  쇠창살에 갇힌 듯한 답답함을 느낀다.

사람들은 뉴스에서 전하는 사건 사고에 중독되어가며
좀 더 강도높고 엽기적인 사건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로 두세명 사망. 이런 기사에는 그다지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처럼 수백명의 사상자가 나온다는 등의 대형사고도
그 피해 당사자가 아닌이상, 유난히 정의감에 넘치는 사람들이 아닌이상
사건과 사고를 재미로 즐겨본 다는 것에, 나는 많은 문제의식을 갖는다.
영화보다 더 박진감 넘치는 실제상황 구조현장,
피해당사자와 그 가족들의 피맺힌 절규, 울음, 숨겨진 스토리.
나만 아무일 없이 평안하다면 이 얼마나 재미있는 장면이란 말인가 라고 생각하며
그 네모난 바보상자를 들여다보고 네모난 컴퓨터 모니터 속의 게임을 즐기고
네모난 글쓰기 칸에 네모난 모양의 글자들로 남을 무조건 욕하고 비방하며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어가는 사회.
양심을 잃고 죄의식도 잃고 나만 편하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이기주의가 팽배한 무서운 사회로 치닫고 있다는 요즘 이 현실에서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가정주부가 내연의 남자에게 중학교 2학년생인 딸을 팔아 매춘을 시키고 돈을 받아 챙겼다는 뉴스를 보고 경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자신의 어린 친딸을 말이다.
그 사건이 뉴스에 보도되었지만, 가정사라고 숨기며 창피하다고 신고를 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아무도 모르는 일로 묻혀 피해여학생의 인생은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각 방송사 같은 시간대에 보도되는 뉴스속에 끼지도 못한 채, 숨겨져 있는
추악한 사건들은 얼마나 더 많을 것인가.
나는 집에 도둑이 들어 내 소중한 물건들을 잃어 본 적도 있고  교통사고도 당했고
학창시절 버스안에서 지갑을 소매치기 당한 적도 있으며
자동차 납치 강도를 당한 적도 있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소매치기 한번 당해보지 않고 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억세게도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는 세상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의미는 필요없고 재미만 있으면 좋은 세상이 된지는 이미 오래됐고
남이야 어떻든 나만 좋으면 된다라는 개인주의조차 선을 넘어선지 오래다.
지금은 개인주의의 차원을 넘어,
남을 짓밟고 무너뜨리고 올라서 내가 살아야하는 이기주의가 너무나 큰 목소리를 내기때문에
이제 우리 사는 세상은 '기본'이 흔들렸고
'원칙'이 무의미해지고 있으며, 진실은 알 필요도 없는 세상으로 향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재미'만 있으면 좋은 사회. 나는 이 사회가 무척 위험하게 느껴진다.

나는 이 위험한 세상을 알면서 안주하여 불의를 따라가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은 실명제를 실시해야 하고
허울뿐인 거짓 사랑을 미끼로 사람을 이용해서는 안되며
피해를 입은 여성이 자신의 피해사실을 밝히고 억울함을 호소했을 때,
그 가해 남성으로부터 역고소를 당해 가중피해를 입는 '명예훼손'법의 적용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는 말처럼 분별력을 잃어가는 사회는 이제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아무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더욱 문제가 아니겠는가.

'기본'이 잘 닦인 상태에서 '원칙'을 지키며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좀 더 큰 목소리를 내며 행동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소수의 변칙과 술수가 큰소리를 낸다해도
원칙과 진실의 작은 목소리들을 합치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획일화된 뉴스, 획일화 된 연예정보등에 현혹되지 말고
스스로의 분별력과 논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꿈꾸는 기본, 원칙, 진실이 통하는 맑은 사회
그 세상을 향해
나는 한 걸음의 도전을 시작하기로 했다.

'재미'만이 아니라 '의미'도 있는 삶을 만들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