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7월 8일. 장애 판정

목향 2009. 3. 31. 17:07

제목 : 2003. 7월 8일. 장애 판정

뉴스를 볼 때마다 무더운 날씨였다는 멘트를 들으면서도
나는 전혀 실감할 수 없었다.
밤새 꽁꽁 닫아 놓았던 창문을 아침에 열면
아직도 나는 반팔 면 티셔츠위에 가디건을 걸쳐입고 쪼그린채 언니 앞에 앉는다.
언니는 더워 부채질을 하고
나는 추워 움추리고 앉은 모습이 우스워, 처음엔 자주 웃었지만
이제는 그나마도 익숙해져 버렸다.

언니와 나는 나란히 외출을 했다.
언니는 반팔 옷을 입었고
나는 긴 소매 옷을 입은 채였다.
얼마나 오랜만에 바깥공기를 온전히 맡는 것인지,
오가는 사람들의 민소매 옷차림도
장마가 시작될 것을 예고하는 물먹은 공기도 내겐 생소하기만 했다.

큰 마음먹고 외출을 한 터라,
들러야 할 곳도 많았고 주차공간이 부족할 테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아서
자동차를 두고 걸어가기로 했었다.

길을 지나며 마주치는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걸어오고
악수를 청해왔다.
그들이 묻는 질문은 언제나 똑같다.
"건강은 괜찮으세요? 꼭 건강하셔야 해요"
그러면 나도 언제나 씩씩하고 밝게 웃으며 "네!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한다.
오늘도 같은 일들이 계속 반복되었다.

수예점. 사진관. 농협 매장. 등등을 돌았지만
원래 오늘 언니와의 외출 목적은 동사무소에 가기 위한 것이었다.

장애 판정 등록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내가 장루보유자로 법적 장애인으로 등록되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 걸어오는 길,
길가에 바구니마다 소복하게 담아놓고 자두를 파는 부부를 만났다.
아저씨가, 맛있다면서 자두 하나를 옷에 쓱쓱 문질러 닦은 후,
먹어보라며 한사코 사양하는 내게 건넸다.
나는 신 것을 잘 먹지 못하지만 그 자리에서 한입 베어 먹으며 "아주 맛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과연 먹을까 싶은 자두 한 소쿠리를 샀다.

꽤 먼 거리를 걸어다녔다.
좁은 골목길에서의 복잡한 교통때문에 마음대로 걷지도 못하고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기도 했다.
에어컨 바람이 겨울바람처럼 느껴지는 상점에도 머물렀었다.

친절한 미소로 인사를 나누는 이웃도 만났고
우리의 어깨를 치고 지나면서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는 무례한 사람도 마주쳤다.
선과 악. 흑과 백.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와보니 발가락엔 물집이 생겨있었다.
걸은 만큼 생기는 결과물이다.

거리에서의 표정과는 다르게
이내 우울해 늘어지는 나를 보고 언니는 걱정이 많았다.
내가 오늘 밤에 먹어야 할 약을 몰래 꺼내 예쁜 종지에 담아 내놓고 있었다.

나는 언니에게 그 많은 약들 한꺼번에 다 먹으려는 어리석은 짓은 안할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나는 내 마음을 읽고 있다.
도전해보지도 않고 두려움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내 삶을, 최대한이라고는 장담할 수는 없어도
비굴하게 만들지 않도록
하늘 아래 부끄럽지 않도록 꾸려가기 위해
할 수 있는 만큼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장애의 고통을,
목숨이 붙어있는 한,
짊어진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