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7월 3일. 시리다.

목향 2009. 3. 25. 15:06

제목 : 2003. 7월 3일. 시리다.

비 내린 후
돗수에 딱 맞는 안경을 새로 장만해 낀 것처럼
창밖 풍경이 맑았다.
창이 200호 정도의 그림의 액자라고 여겨졌고
몇백년이 흘러 빛 바라고 먼지 탄 고화의 복원작업을 마친 상태인 것 같은
나의 창이 보여주는 풍경화.
눈이 시리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언제부턴가
오른쪽 새끼손가락의 가운데 마디부위가 불거져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할 때마다
손마디가 시리다.

암 수술을 하고 난 직후부터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여달라고 비명지르게 하던
왼쪽어깨의 통증과 굳음.
3년이 넘도록 어깨를 쓰지 못하고 지내다가
이제 기타를 칠 수 있을만큼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어깨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이미 경험해 본 고통에 대한 끔찍한 두려움
그것은 불규칙한 심장박동과 잦은 현기증. 과호흡증에 의한 호흡곤란만큼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요인중 하나다.
왼쪽 어깨가 시리다.

언니는 이삼일 간격으로 단팥죽을 쑨다.
내가 종일 먹는 것이 단팥죽에 우유를 잔뜩 부어 먹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저작활동조차 할 의욕이 없는 내가
몇번 씹지 않고도 후루룩 마실 수 있는 훌륭한 먹거리중 하나다.
가스렌지 앞에  오랫동안 서서 팥을 휘저어 끓이는 죽.
어느새 언니는 단팥죽을 끓이고 있었다.
아. 나는 사랑받고 있다.
부엌에서 새 나오는 끓는 팥 냄새에
잘 먹지 못하는 자책감. 언니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 행복함이 실려와
코 끝이 시리다.

열흘 가까이 내겐 일어나 있는 시간보다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일어나지 못했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낮에는 커튼을 내렸고
밤이되면 커튼을 올렸다.
몇날을 밤 속에서만 살았다.
가로등이 더욱 빛나고 오가는 차량행렬이 뜸해질 때
나는 자주 '마지막 잎새'를 떠올렸다.
다시 차들이 많아지고 창밖 가로등이 희미해지며 날이 밝을 때
다시 커튼을 내리기를 반복했다.
눈물이 핑그르 각막을 덮으며 눈이 시리도록 창밖만 내다보았다.
약해진 이도 시리고
스키를 타다 10년전에 다쳤던 무릅도 시리다.
맨발도 시려서
전기장판으로 따뜻하게 데워놓은 이불속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누워서 바라보는 창밖의 하늘.
비 내린 다음날 장막을 걷은 하늘이
바다처럼 보인다.
바다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듯이
하늘나라에 가면 바다가 저렇게 올려다 보일까......
가슴이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