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6월8일. 가위질

목향 2009. 3. 25. 15:01

제목 : 2003. 6월8일. 가위질

미용실이란 곳에 가 본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작년? 아니...
어쩌면 그 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나는 작은 가위로 내 머리를 직접 자르기 때문이다.
그 가위는 원래 머리를 자르는데 쓰이는 가위는 아니다.
눈썹등을 다듬으라고 끝이 약간 둥글게 휜 작은 가위로
나는 내 머리를 싹둑 싹둑 잘라낸다.
뒷 쪽의 머리칼도 웬만한 감각으로 층층이 잘라낸다.

그리하여 내 머리는 더벅머리가 되었다.
훨씬 가볍고 손질하기도 편해졌다.
머리를 감고 그대로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 놓은 채 말리면 끝나는
간편한 머리 손질 방법으로 시간을 절약하고 있다.

빨리도 자라는 머리카락과 손톱.
잘라낸 머리카락을 휴지통에 쓸어 담으며 애잔함을 느끼기도 한다.
일부러 잘라낸 머리카락 조각보다 더 애잔한 슬픔을 주는 것은
머리를 쓸어내릴 때마다
숭숭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이다.
그것은 자꾸만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도 머리를 잘라내고나니 기분이 어느정도 가뿐해졌고
상쾌하게도 아침이 밝았다.

이제 몇시간만 있으면,
"너 또 머리 잘랐구나?" 하는 경쾌한 리듬을 타는 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수영장과 사우나 시설, 골프 연습장, 헬스클럽등이 입주자를 위해서 갖춰져있는
집에 살고 있는지 벌써 몇년째 인데도
나는 단 한번도 그 스포츠 시설을 이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천정이 유리창으로 되어있어 수영장 레인이 들여다보이고
그 안에서 극히 적은 수의 입주자들이 수영을 즐기는 모습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기만 했을 뿐,
그곳은 나와는 별개의 다른 세상이라고만 생각해 왔었다.

가위질로 머리를 잘라낸 후,
나는 새로운 의욕을 갖기 시작했다.
언니가 오면,  헬스클럽에 함께 가서 운동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볼 생각이 들었다.

날마다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듯
지금은 나도 '전진'하고 싶다.
러닝머신위를 달리듯, 한걸음. 한 걸음......

수면제를 먹은지 6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깨어있다.
불면증을 앓고 있는 것을 오히려 축복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남들보다 많은 시간을 부여받았고
늘 깨어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