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6월 7일. 우호적 경쟁심

목향 2009. 3. 25. 15:00

제목 : 2003. 6월 7일. 우호적 경쟁심

이틀 사이에 새로 작업한 반주를 선보이고
새로운 레파토리로 노래를 부르자
언제 그렇게 다 했느냐며 놀라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음악 이외의 다른 일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나는 오로지 내 일에만 몰두하며 온 시간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오늘 록시 공연의 반응은 거의 폭발적인 환호와 박수에 묻혔었다.
그 시간 동안만큼은
어디서 기운이 나는지 나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노래에 몰두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내 순서인 매일 9시 공연을 끝내고
가수 대기실에 들어가면 10시에 공연을 하시는 '송창식'씨가 계신다.

"그래, 반주는 다시 만들었니? 괜찮아졌든?"
"네, 베이스를 낮추고 믹싱을 새로 해서 녹음을 했어요, 괜찮아진 것 같은데요?"
나는 막 공연을 끝낸터라 숨이 턱에 차 오르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채로
대답했다.

"그럼 지난번 녹음한 건?"
"그건 못 쓰니까 버렸어요."
"그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만들바에야, 차라리 기타 반주자를 한 두명 구해서
함께 연주해 보는 건 어떠냐?"
송창식씨가 멋진 제안을 했다.

그러나 그건 현실적으로 내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글쎄요.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좋은데요, 사람 마음이란게 좀 더 좋은 사운드를
점점 원하게 되지 않겠어요?
기타로만 연주하는 것에 한계를 느낄 때는 드럼주자를 영입하고 싶어할테고
베이스 주자는 드러머와 호흡이 잘 맞는 실력자를 구해야 할테고
결국은 밴드가 결성되게 되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밴드를 이끌기 위해서는 편곡실력도 뛰어나야 할것이고
드럼도 칠 줄 알아야 하고 베이스도 칠줄 알아야 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송창식씨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결정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이 시대에서 아주 중요한,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벽과 같은 것이었다.

"어느 남자 기타리스트가 여자가수 밑에서 일을 하겠어요? 시작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건 아마 한달도 못가 문제가 발생하고 말거예요. 그렇죠?"

그러자 송창식씨가 말씀하셨다.
"그럼 여자 기타리스트를 쓰면 되잖아."
아마 창식오빠도 이 말은 농담으로 그저 했을 것이라 믿는다.

"여자기타리스트가 어디 흔한가요? 잘 치는 사람도 별로 없구요 왜 어렸을 때,
남학생들이 기타치는 것은 멋으로 봐주고 여학생이 기타치는 것은 못하게 막았나 몰라요"

결국 이 제안과 대화는 서로 마주보고 '허허' 웃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말았다.

어쩌면 바로 이런 문제가 음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크게 느끼는
남녀차별일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 만나보는 남자가수들 중에서
여자 가수에게 칭찬을 하거나 실력을 인정하는 경우는 외국가수에 해당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국내 여자가수에 대해서 말할 때는,
"그 친구는 노래는 잘하는데, 얼굴이 아니잖아요?" 라든가
악기 연주도 못하고 뭐, 그저 무대에서 얼굴하고 몸매로 버티는 거 아녜요?"
등등의 말들이었다. 그리고는 사생활 얘기가 꼭 이어졌다.

남자가수들의 사생활은 청정수처럼 깨끗한가? 과연 도덕적일까?................

그런 관념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끝없는 벽에 부딪히고 좌절하기도 하고
우울해지고 자괴감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을 것이다.

그 경쟁심은 우호적으로 바뀌길 바란다.
잘하는 것은 잘한다고 창찬해주고
각자의 개성을 인정해 주고
잘못가는 부분은 자상하게 인도해주며 같은 길을 멋지게 발전적으로
개척해가는 대중음악인들이 되길 바란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다고, 그만큼 발전했다고
자신의 영역이 훼손될까봐 경계하고 꼬투리를 잡는 문화가 아니라
남들이 노력하면 나는 그 보다 더 노력해서 좋은 결과를 얻어내는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호적 경쟁심은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발전하게 만드는 필요한 요소가 분명하다.
시기와 질투, 음해는
상대방 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파괴시키는 폭탄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각자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마음속의 폭탄을 제거해야
드디어 평화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현대사회가 가장 필요로하는 '도덕성' 그리고 '원칙'이 인정받는
그 시간을 나는 여전히 기다리며
고지식하게 나의 길을 가고 있다.
느리게... 느리게.....

아직도.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남자의 사기극에
속아넘어간 여자들이 바보라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한,
이 땅의 남녀차별과 여성인권유린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