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11월 5일. 작은 배려, 큰 행복

목향 2009. 4. 5. 14:56

제목 : 2003. 11월 5일. 작은 배려, 큰 행복

아무 것도 하지않을 때야말로
무언가 끄적거리기에 딱 좋은 감성과 조건을 지닌 상태였지만
나는 그 많은 생각들을 가슴으로만 삼켰다.
진실을 그리자면
매일 아프고
괴롭고
처절하게 고독하고
가슴의 상처가 곪고 또 곪아 피고름이 터져나오고
돌 무덤에 생매장 된, 사람이되 사람아닌 심정으로 절망의 심연속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리기조차 포기했던 적도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스스로 내 몸을 덮고 있는 돌덩이들을 하나씩 치워내고
가슴의 피고름을 짜내면서 면역력을 키웠다.

이제 다시 책들을 뒤적이고 자료를 찾는 일에 희망을 키우기 시작했다.
진력나는 세상의 비리와 음흉한 사건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소박하고 정직한 사람들 사이에선 여전히 행복과 배려가 넘치고 있었다.

요 근래  나는
1년여를 쉬고 있던 일을 새로 시작하면서
톨게이트를 지나며 1.100원을 내고 오고가야 하게되었다.
나는 언제나 "안녕하세요?. 수고하세요!" 라는 인사를 해왔다.
어떤 수금창구 직원은 " 감사합니다." 또는 "안녕히 가세요" 라는 인사로
답을 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들은 듯 만 듯, 못들은 척  작고 네모난 영수증 쪽지를
무심히 건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저 분이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면서 얼마나 지루할까' 생각하기도하고
'사람들마다 하는 인사에 일일이 답을 하려면 그 또한 꽤 고된 일이 되겠구나'
생각하기도 한다.
잔돈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을 때는 그것이 미안하기도 하다.
창구직원에게 거스름 돈을 챙기게하는 번거로움도 줄 뿐 아니라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에게도 내 차가 빨리 빠져나가줘야 좋기 때문이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비축해 두었던 잔돈이 모두 떨어지고
5천원짜리 지폐 한장과 500원짜리 동전 두개가 있을 뿐이었다.
톨게이트에 들어서 나는 활짝 웃으며 돈을 내밀었다.
" 잔돈이 없어서 죄송하네요. 이런 경우를 번거롭다고 하시나요?"
미안하다는 뜻의 장난스러운 나의 인사에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5천 5백원이라..... 그럼요~ 아~주 복잡하죠~.
그래도 이 아줌마 치매걸리지 말라고 복잡하게 하시니 좋은데요?"
여유있게 농담을 하며 거스름 돈을 내미는 손길이 벌써부터 따스했다.
나 역시 따뜻한 가슴으로 손을 내밀었다.
"어? 누구신가? 저.. 팬이에요"
"어머! 감사합니다"
돈을 주고 받는 짧은 시간 동안 인사를 주고 받았고
"다음에 만나면 싸인 한장 해주세요" 하는 소리에
"네에~~~~ 그럴게요~~~"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며 게이트를 나왔다.
아마 그 창구직원은 "네에~~ 그럴~" 이라는 소리밖에 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 .. 게요~~~" 는 메아리처럼 차창을 통해 공기중으로 번져나갔다.

톨게이트 창구직원의 여유있고 배려있는 농담 한마디가
우리 두사람을 크게 웃게했고
그 웃음은 톨게이트를 빠져나오고도 한참동안이나
내 입가에 머물렀었다.
사소하게 오고 간 말 몇마디가 온 몸을 따뜻하게했다.
긴 웃음을 달고 집에 돌아 온 나는 작은 행복함을 느꼈다.

내일 일을 위해 가방을 정리하며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천사라면 얼마나 재미없을까? 얼마나 살기 좋을까?'
예전의 노래 가사같은 문장을 떠올렸다.
그랬으면 좋겠다.....
아직 채 아물지도 못한 상처에 또 상채기를 내려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세상사람들이 모두가 천사라면.....
난 그랬으면 좋겠다.
세상사람들이 모두가 천사라서
그리하여 오늘 나는 행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