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11월 13일. 반 추

목향 2009. 4. 5. 14:59

제목 : 2003. 11월 13일. 반 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햇수로 6년여간
나는 MBC-FM 의 '정오의 희망곡'의 DJ였다.

처음 방송진행 섭외를 받았을 당시만해도 '정오의 희망곡'은
청취율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왜냐면 KBS-FM의 '가요광장' DJ 오미희씨가 청취율 1위의 아성을
좀처럼 무너뜨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 몇달간은 나 역시 조용히 분위기있게 방송을 진행하려 해왔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이 상태로는 안된다' 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다가왔다.

제작회의가 있던 날,
나는 프로그램 분위기를 기존의 진행방식과 완전히 다른,
고정관념을 깨는 활발하고 통통튀는 방식으로 바꿔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댄스 댄스' 코너를 진행하며 스튜디오에서 춤을 추기도하고
목소리의 톤을 높여 밝고 웃음이 섞인 프로그램으로 전환시켰다.

오후 2시 방송이 끝나고 작가였던 오미지씨와 함께 늦은 점심을 해결하러
방송국 앞 수제비집에 들렀을 때,
옆자리에서 무심코 들려오는 소리.
"야 너 정오의 희망곡 들었니? 거기서 길은정이가 이러이러한 말을 하더라?
나두 그거 내 친구한테 써먹어야지"
같은 말이 뒷전에서 들려왔을 때 우리는 보람을 느끼고
더 열심히 해보자는 각오를 다지기도했다.
그래서 MBC 서점을 쥐 팥방구리 드나들듯 했고 오로지 방송의 품질만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시절에는 우여곡절도 많아서
방송 노조 총파업으로 인해 파행방송이 불가피할 때였다.
그때도 우리는 (오미지씨와 나) 피디없이도 선곡하고 음반고르고
믹싱하고 4개월이 넘는 파업기간동안
청취자들은 전혀 내적인 어려움을 알 수 없도록 방송을 진행해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니
어느새 '가요광장'의 청취율은 점점 떨어져갔고
'정오의 희망곡'의 청취율은 1위의 고지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자 덩달아 MBC의 다른 프로그램들까지 청취율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김기덕. 김창완. 양희경. 김미숙. 최명길. 배철수. 유열. 그리고 나.
MBC-FM의 전성시대를 이룬 때였다.

그리고 1992년 나는 청취율 1위를 만든 공로로
'MBC 연기대상 라디오 디제이부문 상을 수상하게되었다.

나는 데뷔시절부터 '매니져'가 없었기에 나 자신을 알리고 PR 하는데는
아주 젬뱅이었다.
그리고 언론과는 일체 접촉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런 큰 성과를 거두고도 신문에 기사한 줄 나지 않았었다.
인간관계의 폭도 좁았다.
오로지 일밖에 모르고 살았기때문이었다.
한낮의 프로그램을 밝고 통통튀는 목소리로 컨셉을 바꿔놓은 최초의 DJ는 난데,
사람들은 그걸 알지 못했다.
그래... 사는 게 이런 것이구나.....
이래서 매니져가 필요한 것인가보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지은 적도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방송을 진행하면서 그나마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내용이다.
그러나 그 뒤에 감춰진 말할 수 없는 비리, 불의를 지켜보며
나는 점차 회의를 느껴가기 시작했다.
나를 밀어내고 그 최고 인기 프로그램을 차지하려는
로비는 치열했다.
여러 든든한 후원자나 백그라운드를 동원해 나를 몰아내기위한
작전이 물밑작업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나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즈음 나는 조용히 MBC 에서 방송을 그만두었고
한국의 불합리, 부조리에 염증을 느껴
샌프란시스코로 무작정 떠났었다.

나는 한국사회에서 살아가기엔, 너무나도 합리적인 것을 찾는 내 생활방식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미국에서 상점 종업원일을 하더라도 내가 일한 만큼의
보수와 대가를 인정받는 정직하고 깨끗한 계산이 이뤄지는 곳에서
살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은근히 촌지를 요구하고 그에 응하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교묘하게 당하는 한국사회에 환멸을 느꼈었다.
나는 그런 술수를 쓰는데는 빵점을 받는 언더그라운드였기때문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돈에 연연하지 않고 윗사람들로부터
부당한 압력을받지 않으며  일할 수 있는 방송자리를 찾던중,
KBS 피디로부터 내가 사는 미국으로 전화가 걸려왔었다.
"야! 너 거기서 뭐하냐? 당장 안들어와? 여기 낮12시부터 2시까지 프로그램인데
너 당장 들어와서 이거 진행해! 알았어?
너 지금 안들어오면 다시는 나 볼 생각하지마!"

전화를 걸어왔던 피디는 내가 데뷔시절부터 알던 분으로 아무런 조건없이,
마치 아버지처럼 날 아껴주시던 분이었다.
난 결국 미국생활을 접고 짐을 싸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방송을 시작하게되었다.
그것이 잘한 선택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때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내 삶은(지금 맘고생이 심한) 달라졌을 것이다.

그후로도 나는 계속 한국을 떠날 궁리만 하며 살았고 방송에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유학까지 계획하고 차곡차곡 저축을 하고있었는데
내 그런 뜻은 번번히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은 전혀 신경쓸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모든 일들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일일 뿐이다.
과거에 1위를 했었든, 어떤 상을 받었었든, 그것은 모두 과거의 일이다.
과거에 어쨌든 그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고
지금 현재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으며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을 대하며 얼마나 기본을 잃지않고 있느냐가 중요한 일이다.
그때 만약 오만함을 가졌었다면
지금 나는 더욱 힘들게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지금껏 음반작업에서나 방송에서나 내 아이디어를 도둑맞은 적도 많았고
치열한 방송계의 경쟁속에서 환멸을 느낀 적도 많았기에
이제 나는 그 혼탁한 좁은 세상으로 들어가 구속되는 것을 거부하려한다.
나는 역시 언더그라운드에 있는 것이 성격상, 체질상 맞으며
그곳에서 찾는 보람이 더욱 크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나는 요 몇년동안 다른사람들이 진행하는 방송은 일부러 듣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나의 색깔이 변해갈까봐, 세상과 타협할까봐,
스스로 겁이나서였는지도 모른다.

청취율 꼴찌였던 '정오의 희망곡'을 청취율 1위로 만들었던 나만의 방식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 나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노래하나 추억 둘'을 나만의 진행방식대로 꾸며가고 있다.
반드시 이기기위해, 1위를 목표로, 같은 따위의 목적은 없다.
다만, 나와 함께 하는 방송이 어느 한사람에게만이라도
추억을 되살려 조그마한 감동이라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게 무척 커다란 보람일 것이다.

지금도 나는 매니져가 없다.
그래서 언론플레이에는 한없이 약자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내 개성대로 방송을 꾸려갈 수 있다는 조건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 것인지 모른다. 언더그라운드란 시골같은 것이다.
자연같은 곳이다.

나는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의 마음에 충분히 공감한다.
이 도시에는 이제 항생제가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