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11월 22일. 내가 하는 짓

목향 2009. 4. 5. 15:01

제목 : 2003. 11월 22일. 내가 하는 짓

바람이 회초리를 든 것 같았다.

유난히 손 발이 차, 여름에도 양말을 신곤하는 체질이기에
바람의 회초리를 맞으며 기타를 꺼내들고 '록시'의 가수대기실로 가는 사이
벌써 손이 곱아버렸다.
내가 양손을 엇갈려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손을 녹이고 있는 가운데
가수대기실에는 또 다른 분주한 손놀림이 있었다.

밤 12시에 공연을 하는 우리나라 타악기 연주의 대가 '류복성'님이
드럼의 가죽을 손보고 나사를 하나하나 정성껏 조이고 있었다.
호기심이 금방 들키도록 그 손놀림에 눈을 고정시키고
어린아이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나를 보시고는 말씀을 시작하셨다.

드럼이야기, 젊은 시절 미8군 공연부터 KBS 관현악단 시절의 연주이야기....
말이라는 것이 필요없다고 스스로 혀를 잘라내버린
드럼연주자 김대환님의 이야기.....

"10곡의 연주를 한다했을 때 팀과 잘 안맞으면 짜증이 나다가도 말야.
단 한곡이라도 호흡이 잘 맞았다고 느낄 때,
이거다! 라고 느끼며 연주를 마쳤을 때, 그때의 희열이란 말야...... 히힉,,,,
그래서 아직도 이 짓을 하고 있는 거겠지?"
하며 어린아이처럼 웃으셨다.

"저도 드럼연주를 배우고 싶어요" 라고 내가 말하자,
"몸이 건강하면 배워보라고 하고싶고, 가르쳐주고 싶은데,
지금 그 체력으로는 무리야. 처음 배울때는 꽤 고되거든....
이건 리듬뿐이잖아. 재미가 없지. 체력소모가 얼마나 많은데......."
라며 드럼을 연주해보겠다는 나를 말리셨다.

나는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가진 체력으로는 오로지 한가지 일을 위해
다른 모든 즐거움이나 경험들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고
또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 모든 에너지를 완전히 비축했다가 하루의 방송에 모두 쏟고
또 비축했다가 하루의 공연에 모든 걸 비워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기위해서는 친구를 만난다거나 사사로운 외출을 한다거나
전화통화를 해서 말을 많이 하게되는 일도 자제해야하는 일이고
심지어 미용실에 가는 일등도 엄청나게 피로하게하고
에너지 소모를 가져오기에 피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미용실에 가 앉아 머리를 만지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아깝고 소모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1년에 딱 한 번정도 가는 미용실행이 내게는 거사에 속한다.

그래서 나는 내 머리카락을 집에서 직접 잘라낸다.
조그만 가위로 쑹덩 쑹덩 잘라내 머리길이가 각각 달라 우스운 꼴이 되어도
그대로 감아 툭툭 털어내고 손으로 쓱쓱 빗어넘겨 더벅머리가 된 채로
지내는 것이 내 마음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나는 옷에도 속박당하고 싶지않고
좋은 차, 좋은 집, 많은 돈, 여행등에도 구속되고 싶지 않다.

부자들의 넓은 집에 최고급 가구로 치장한 실내라해도
그곳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비슷하고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비싼 침대에 화려한 조명,
고급 천으로 만들어진 명품 브랜드의 시트를 깔고, 부드럽고 비싼
고급 카펫을 밟고 침대에 오른다해도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잠 자는 일' 뿐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의자는 앉으라고 있는 것이다.
고급 외제차를 타도 도로위에서 밀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부자들의 손에 끼워져있는 이름 모를 커다란 보석들도
실은 그저 각각의 구성 원소가 다른 돌멩이에 불과하다.

나는 고급 레스토랑의 1인분이 십만원에 가까운 스테이크 요리보다
방송이 끝나고 녹음을 앞둔 밤시간,
로비 조그만 테이블에 쪼그리고 앉아 먹는 김밥과 오뎅국물이
훨씬 맛있다고 느낀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부럽지 않고
엘리트 집단이라는 사회 지도층에 있는 이들도 부럽지 않다.
어쩌면 그런 이들이, 지루해 어쩔 줄 몰라하며 매일 찾아헤매는 재미를
나는 내 마음안의 자유에서 얻을 수 있어선지도 모른다.

소박한 방송을 진행하며
음악의 시간과 방송이 끝나야 할 시간을 초 단위로 계산해
딱 제 시간에 말을 맞추고 박자가 맞을 때의 그 만족감은
나만이 아는 즐거움일 것이다.
재즈 연주중에 제 박자를 찾아 들어가는 그 희열처럼
방송도 그런 잼 연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도
삶의 일반적인 유흥과 즐거움 만남과 교류등을 모두 포기하고
언더그라운드에서
고독과 외로움을 덮고 살면서도
방송과 노래....
아직도 이 짓(?)을 계속하고 있는 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