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4. 1월 3일. 가시돋은 나무

목향 2009. 4. 21. 14:08

제목 : 2004. 1월 3일. 가시돋은 나무

나무는 참 여러가지의 얼굴을 가졌다.
나는 다행히도 날마다 집을 나서 지날때마다
나즈막한 고개 길가 나무들이 계절마다 잎모양이 변하고
색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커다란 창으로는 하늘아래 자그만 동산하나가 보이고
때때로 그 풍경은
내가 도시에 살고있다는 사실을 잊게 하기도한다.

조금 떨어져 바라보는 나무는 이쁘기 그지없다.

그러나 나는 말레이시아 자연보호구역 밀림에서 보았던
무시무시한 나무들도 기억한다.
나무는 사람이 가까이 가는 것을 몹시 경계하고 있다.

멋진 모델이 나무에 기대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은 환상적일 것이라는
상상을 불러일으키지만
실제로 나무에 기대어 있자면
살갗을 찌르는 거친 나무껍질과
찐득거리는 액체들.
그 사이로 분주히 오가며 침을 쏘아대는 수많은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아마도 모델은 사진촬영이 끝나자마자 비명을 질러대며 나무곁에서 떨어져나와
머리와 옷을 털고 진저리를 칠 모양새다.
나무는 그저 멀리서 바라볼 때 멋지게 보일 뿐이다.

숲에는 가시가 박힌 나무도 있다.
온 몸을 표창같은 가시로 뒤덮고 숲에 몰래 숨어있다.
잎이 무성한 나무들 틈에 끼어 순진한 척 내숭을 떨고 산다.
그 곁을 무심히 지나다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는 이도 있다.
가시가 박힌 나무는 죄책감이 없다.
왜 내 곁을 지나갔느냐며 오히려 꾸짖기도한다.
조심해야할 나무다.

가시를 품고사는 사람도 있다.
자신은 하고픈 멋대로 뻗어가며
찌르고 고소해하고
아파하면 즐기고
죄책감이 없다.
네가 부주의한 탓이라며 책임을 전가시킨다.
방자한 자태로 산다.
조심해야할 사람이다.

사람에게도
나무에게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거나
온 마음을 다 주진 말 일이다.

나는 가시돋은 나무에 수없이 찔렸다.
오늘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얻은 상처와 흘린 피로인해
누군가 이익을 얻었다면
그다지 나쁜일은 아닐 것이라고 말이다.
그만큼 누군가에게는 좋은 일을 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조금 떨어져 바라볼 때 나무는 아름답다고 말하는
내 자신이 바로, 너무나 아무 것도 아닌,
잎새도 떠나고 벌레들도 떠난
헐벗은 겨울나무란 것이다.
겨울나무는,
이 겨울이 어느 겨울보다 추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