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4. 1월 8일. 갈 수 없는 길

목향 2009. 4. 21. 14:10

제목 : 2004. 1월 8일. 갈 수 없는 길

며칠 전 심야 텔레비젼 프로그램 '문화** -스승과 제자' 를 보았다.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님과 그 제자의 이야기를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침묵을 연주해라" 황병기님이 말했다.
"네? 침묵을 연주해요?" 제자가 대답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경험했다.
침묵마저도 연주하라니.....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대장금'에서
"맛을 그려보아라" 라는 대사와 흡사한 내용이었다고나 할까.

침묵마저도 연주하기위해
제자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곪고 껍질이 벗겨지고 굳은 살이 만들어지고를
거듭하면서도 가야금을 연주하는 아티스트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모든 장인들이 그러하지 않겠는가.
내가 아는 방송작가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는 만년필에 손 자국만큼 홈이 패도록 원고를 썼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지금은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관절이 아파
더 많이 쓸 수 있는 원고를 놓쳐야 한다고 했다.

기타리스트도 드러머도 조각가도 어떤 종류의 전문가도
열심히 한만큼 그 과정이 고스란히 손이나 몸 어딘가에 남기 마련이었다.
내가 아는 어느 가수는 너무나도 열심히기타를 친 이유로
기타 지판을 잡는 왼 손가락에 굳은 살이 지나쳐 티눈이 박혀버려
수술을 해야하는 지경에 있으며
내가 아는 퍼커션 연주자는 드럼 스틱 잡는 양 손가락과
봉고등을 두드리는 손바닥이 거북의 등껍질 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농부의 손에도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에도
남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흔적들이 훈장처럼 붙어있는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일까.
내게도 그만큼의 흔적들이 손 마디마디에 배어 있을까....
그러한 의문들로 며칠을 보냈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언제나처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나는 진정 보잘 것 없다는 것.
그런 진실을 인정하며 내 마음안의 자만을 버렸다.

언제까지 그리고
어디까지인지 모르나
쉼없이 정진하는 길은 멀기만 하다.

아직 내 손은 부드러움에 가깝고
침묵을 연주하기는 커녕
침묵을 이해하는 것조차 어렵지 않은가......

다시 등골이 오싹해져 옴을 느끼며 새벽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