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4. 9. 14. 나는 무엇을 했는가.

목향 2009. 5. 1. 16:31

제목 : 2004. 9. 14. 나는 무엇을 했는가.

나이가 비교적 어린(?) 젊은 방송작가들에게서
자주 듣는 질문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무슨 프로그램을 하셨었죠?
'뽀뽀뽀' 랑 '가요 톱텐' '정오의 희망곡' 인가요?"

나는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위에서 말한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출연했었다.

1984년에 뜻밖의 우연으로 '소중한 사람'이라는 곡을 취입하며
가수로 데뷔했고
이후 여러장의 음반도 발표했었다.

올해로 딱 만 20년이 지난 방송생활 동안
방송을 떠나 쉬어 본 기간은 거의 없었다.

무슨 프로그램이던,
나는 계속해서 일을 해왔다.

내겐 주말도 휴일도 없었고
오로지 방송만 했다.

젊은 기자들은 가끔 나와 인터뷰없이 기사를 쓰기도 하는데
그 중의 압권은 이런 것이었다.

"길은정은 84년 '높아만 가네'로 데뷔해,'소중한 사람'등 다수의 히트 곡을
가지고 있다" 라는 내용도 있었다.

'높아만 가네'란 나의 데뷔곡 '소중한 사람'의 첫 가사다........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했죠? 라는 물음에
나는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정말 수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긴 했었다.

각종 연말 시상식. 연말 특집 프로그램. 가요제.
텔레비젼 쇼 프로그램. 교양 프로그램.
개국기념 프로그램. 라디오 프로그램.
청소년 프로그램. 가족대상 프로그램. 음악 프로그램.
팝송 프로그램. 유럽음악 프로그램. 가요 프로그램.
공개방송. AM라디오. FM 라디오.
각 방송사 전체를 다니며
내게 주어진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청취율 꼴찌의 프로그램을 청취율 1위 프로그램으로 만들기도 했고
시청율 최고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단 한 텀의 개편기간동안만 방송되고
프로그램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더불어 과분하게 상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내가 무슨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는지,
그 프로그램의 타이틀을 기억하는 경우는 몇 안된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했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일이 주어졌던 간에
나는 그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했던 기억 뿐이기 때문이다.

어느 방송사의 어떤 프로그램이었는지는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저, 오로지, 열심히 했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그리고 인지도 높은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일은
이미 과거의 일이고
그것 또한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많은 상과 감사패와 표창을 받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나는 지난 20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어떤 상황에서든,
그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기만 했다.
게으름은 피우지 않았다.
요령도 부리지 않았다.

오늘 나는 생각했다.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도 중요하겠지만,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진행했던 수많은 프로그램의 제목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주어진 상황안에서 아주 열심히 했었던 기억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악조건 속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노력을 다했다.
지난 20년 동안 내가 한 일은 바로 그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떤 자세로, 어떻게 일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것도 아주 즐겁게 말이다.

내게 남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
보람있게 보내려한다.

무엇을 했느냐보다
어떻게 했느냐가 더 의미있게 느껴진 하루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