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4. 9. 28. 추석이라했나?

목향 2009. 5. 11. 15:00

제목 : 2004. 9. 28. 추석이라했나?

차례상을 차려야하는 맏며느리인 언니가
잠시 짬을 내 다녀가며 죽을 끓여내 주긴 했지만

내 집에는 적막감만이 흘렀다.

내 친구인 강아지, 아니 이제는 강아지가 아니다.
벌써 나이 7살이나 먹은
그러나 나밖에 모르는 중년의 개.
'코코 샤넬'양도
내 휠체어가 낯설기만 한지
가까이 다가오려하지도 않는다.

나 역시도 체중 2Kg이 조금넘는 그녀를 안아올릴
힘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휠체어에 앉아서는 더욱 어렵다.

어쩌다 무릎위에 올려놓고 집안을 돌며
그녀에게 휠체어 드라이브(?)를 시켜주는데,
선천적 심장병을 앓고있는 그녀는
아직 두려움이 더 앞서는가보다.

진통제를 먹고 누웠다가
혼자 일어날 수 없을 정도의 통증때문에
괴로워했다.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떻게 지내느냐는 안부전화였지만
서로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직업이 의사인 지인은
지금의 내 상황과, 앞으로 전개될 과정을 예측하고 있기때문에
어쩌면 냉정하게 여겨질 정도로 대화를 약간 이어갔다.

"벌써 몇년째, 친구들이랑 가족들이랑 스키타러 같이 가자고
약속해놓고 못 지키고 내년을 기약하고 그랬는데....
이젠 그 약속 못 지키겠다......" 내가 말했다.

"그렇겠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자그마한 떨림이 느껴졌다.

나 역시도 콧잔등이 시큰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둘러 전화를 끊고나서
나는 의사의 어떤 말에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아주 잠깐 소리내어 울어보았다.

오늘이 추석이라고 했던가!

텔레비전에서는 난데없는 한복을 전부 입고나와
짜고 만드는 편집 된 오락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혼자서는 아무데도 나갈 수 없는 나는
침대옆 스탠드 불빛만으로 분위기를 내는
어두운 방,
침실 창밖을 그저 내다보고만 있었다.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지고 그 부위도 넓어져
거동이 하루가 다르게 불편해지고 있다.

이렇게 마약성 진통제에만 의존해
진을 빼고 누워있어야만 한다면
아마 나는 곧 폐인이 되고 말 것 같다.

그래도 내일이면 방송국으로 나가야하고
해야할 일이 생겼으니
그 기대감에 오늘의 고통을 조금은 잊는다.

내일은 아무래도 귀경길 차량들 때문에
더욱 일찍 서둘러 나가야하기에
수면제와 진통제를 한꺼번에 털어넣었다.
더불어 위의 부담이 커진다.

내가 하루에 먹는 약의 양이 얼마나 되나
순간적으로 계산해봐도
약 40알은 족히 넘는 것 같다.

오늘 언니와 마주앉아
내가 알고있는 재미있는 얘길 해줬고
언니는 뒤로 넘어갈 듯 웃음보를 터뜨렸다.
잘 기억했다가 집에가서 형부에게 해줄거라면서....

역시 그렇게 웃을 때가 좋다.
방송을 진행하며 음악에 빠져있을 때가 좋다.
힘은 들겠지만
내일 방송국으로 나갈일이 기다려진다.

언제나 그랬듯이 올 추석도 나는 홀로 있었고
송편은 구경도 못했고 (옆에 있다해도 먹지 못했을 것)
한가위 달은 올려다보지도 못했다.
내겐 그저 남아있는 시간중에서
하루를 더 살아낸 날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