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하기 힘든 말
장례식장 입관 실, 조카딸 (고인의 맏딸) 의 슬픔은 하늘에 닿는 듯 했다.
“엄마, 엄마가 왜 거기에 누워 있는 거 에요. 엄마!”
딸은 절규했고 쓰러질 듯 몸조차 가누기 어려워 보였다. 하기야 그 경건하고 숙연한 마지막 고별 장에서 그 누군들 슬프지 않으리.
손 위 시누님이 너무도 갑자기 저 세상으로 가셨다. 그냥 감기 몸살이려니 그저 병원에 가서 주사 한 대 맞으면 되겠지 했는데 병세는 시간이 갈수록 심상치 않았다.
입원 하루 만에 내가 전갈을 받고 급히 병원에 갔을 때 이미 형님은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 마지막 고비를 숨 가쁘게 달리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이튿날 나온 병명, 급성 폐혈 증! 입원 3일 만에 어이없게도 먼 세상으로 가게 된 것이다. 슬하의 4남매를 키우고 보내고 이제 웬만큼 살만해졌는데 평균 수명에도 훨씬 못 미치는 나이에 아흔이 넘으신 노모를 두고 그렇게 갔으니 참으로 허무하고 애통한 일이었다.
입관 대에 반듯하게 누운 고인, 정말 잠을 자는 듯 평온해 보였다.
형님, 부디 좋은 세상으로 가세요. 나는 울음을 삼키면서 마음 다 해 두 손을 모으고 빌고 또 빌었다. 그 순간 얼핏 떠오른 생각 나 또한 저 자리에 눕게 될 것이란 미래상이다. 그 누구도 비껴 갈 수없을 진데 누군가가 내 편안한 영혼의 안식을 위해 이토록 지극한 심정으로 기도해 줄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자는 절차에 따라 모든 의식을 마쳤다. 화장장에서 유골 함이 나오고 인근 사찰에 안치되고 ……. 처음부터 끝까지 장례절차에 참여한 나는 생의 종점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느낀 것도 많았고 생각도 깊었다. 일상에서 보통 잊고 지내기 일쑤인 죽음에 대한 문제를 절실한 마음으로 되짚어 보며 남은 생의 정리라고 할까, 삶의 방향도 거듭 헤아려 보게 된 것이다.
이제 남은 이들은 못 다한 사랑과 그리움에 눈물짓는 날이야 왜 없을까마는 흐르는 세월과 함께 차차로 잊혀져 갈 것이다. 세월은 망각의 묘약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당면한 문제, 아흔이 넘으신 어머님 (나의 시모님)을 두고 그렇게 갑자기 맏딸이 갔으니 누가 어떻게 어머님께 이 기막힌 말씀을 전해야 할까? 누구나 그렇듯 어머님께서도 7남매를 두셨지만, 유독 큰딸에게 많은 것을 의존 하셨다. 시부님이 일찍 별세 하셨기에 형님은 딸이면서 남편이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초정리 약수 온천에 같이 다녀오셨다. 나의 어머님은 연세는 많으셔도 아직까지 정정하신편이다. 그러기에 일주일이 멀다하고 솔직히 며느리인 나보다 이 따님과 자주 만나 모녀의 정을 나누면서 같이 늙어 가셨다. 단 며칠만 그 따님이 안보여도
“얘, 재영 (조카)엄마는 왜 안 오느냐?”
고 하실 정도다. 그런데 그런 자식이 먼저 저세상으로 갔으니 어떻게 그 말씀을 드리나 정말, 정말 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리저리 핑계를 대는 것도 한계가 있지 더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미루다보니 벌써 사 십구일 재가 되었다.
애들 고모부는 죄인이라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다른 일에 꽤 강한 듯한 남편도 차마 입을 열 수 없다고 한다. 나 역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 무렵 어머님을 대하면 중대한 일을 감추고 있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바로 들지 못하면서도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만일에 충격을 받아 쓰러지시기라도 한다면, 아니 그 보다 앞선 생각은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하는 것이 그분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드디어 가족회의가 이루어졌다. 남편이 말 한다. 바로 이웃에 사는 당숙께 부탁한다는 거였다. 평소에 어머님과도 친분이 두터우니 잘 전달 할 것이란 대목에서 후련함 마저 느끼는 듯 했다.이렇게 해서 그 어려운 말씀을 어머님께 전하게 되었다. 다음날, 불안하고 조심스런 마음으로 찾아뵈었을 때 적어도 표면적으론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한 음성으로 “인명은 재천”이란 말씀을 뇌이시며 오래 고생하지 않고 갔다니…….
우선 병석에서 많이 고생하지 않고 간 것에 스스로 위안을 삼으시는 듯 했다. 역시 그 분 다운 처사였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시는 모습에서 한 밤의 슬픔과 고통이 얼마였는지 가늠하고도 남았다. 자식을 잃으면 부모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던 가! 아마도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 까지는 저 깊은 마음 한 자락에 고이 보듬고 계시리라. 평상시에도 속 깊으신 어머님의 심중을 알고는 있었지만 담담하신 그 표정에서 더한 존경심이 울어 나왔다.
시누이와 올케, 시어머니와 며느리, 바로 내가 그 올케이고 며느리이다. 우리의 전통적 관습에서 볼 때 한 남자를 중심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선 껄끄러운 관계일 수 도 있다. 엄격히 피한 방울 석이지 않은 남남이 아닌가. 그러나 시집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얼굴 붉힌 적이 없다. 그것은 바로 내가 잘해서가 아니고 시누이나 시 어멈님의 이해와 관용과 사랑이 크기 때문이라 믿는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을까, 나 역시 허물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 판단하건데 특히 며느리로선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이러한 나를 잘 감싸주고 용서해준 두 분께 그저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절대자께 빌고 싶다. 앞으로는 순서대로 데려가시라고 자식 먼저 떠나서 부모가슴에 대못박는 일만은 말아달라고 절실한 마음으로 기구해 본다. 무엇이 그 보다 더한 슬픔일까!
나는 딸만 셋을 두었다. 조금은 생뚱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만일 어머님께서 내게 꼭 아들을 두어야 한다고, 반드시 당신의 손자를 보아야 한다고 강압적으로 밀어 붙였다면, 아니 그에 따른 귀에 거슬리는 격한 말씀을 단 한 마디라도 하셨다면 나는 아이를 셋까지 낳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내 소신대로 자식 하나로 종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속내를 감추신 어머님의 그 깊은 마음이 나를 감동시켰고 나는 할 수 있을 만큼의 노력은 해야겠다는 의미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셋까지 출산을 감행 한 것이다.
어머님, 부디 마음잡으시고 가시는 날까지 건강하게 사세요.
불효한 저 며느리, 간곡히 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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