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

고독한 존재

목향 2008. 11. 25. 16:28

                                                         고독한 존재
                                                                                                                                                           김종선(목향)


뒷짐을 지고 산 너머로 기우는 일몰을 멀거니 바라보고 서있는 스님의 등 뒤로 고독과 우수가 흐른다.
아까부터 스님은 그 자리에 그렇게 서있었고 나 또한 멀찍이 반석에 앉아서 그러한 스님의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분이 명상에 잠기는지 고독한지는 내 느낌일 뿐이지만, 내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그렇게 보였다. 해질녘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 때문인가 더욱 쓸쓸하고 고독에 젖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랜만에 영주 부석사를 찾았다 가끔은 마음속에 그리던 추억의 장을 찾아온 셈이다.
햇병아리 선생 2년차 여름방학이었으니까 강산이 수십 번 바뀐 터이다. 그때 친구 셋이서  새벽 04시에 충주를 출발해서 저녁어스름에 도착을 했는데 이번엔 점심 후 출발해 2시간 남짓 승용차로 달려 왔다. 결코 짧지 않은 시공을 뛰어넘었기에 미루어 상상은 했지만 사찰 주변도 많이 변해있다.

그때는 온종일 택시한대 볼 수없었고 전기는 물론 전화도 없어 일주에 두 번 올라오는 우체부를 기다려 소식을 전했는데 지금은 넘쳐나는 승용차가 주차장을 꽉 메우고 있다. 마음대로 드나들던 요사채, 범종루, 음향 각에도 외인 출입금지란 푯말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울퉁불퉁 흙길이 포장되어 말끔한 모습이지만 마음은 그때의 정취를 아쉬워하며 감회에 젖는다.

다만 그대로인 것은 병풍처럼 둘러친 산세, 그 간 한 번도 단청을 하지 않은 듯한 무량수전을 비롯한 전각들이 고색창연하게 퇴락해 고찰의 운치를 더하고 울울창창 숲속에선 여전히 산새들의 지저귐이 싱그럽다. 또한 이따금 제 세상을 만난 듯 울어대는 매미들의 합창도 여전하고 솔바람에 실려 오는 녹향이 옛 그대로다.
 
흘러간 시간은 아쉽고 추억은 모두가 아름답다고 했든가. 나이 들면 추억 속에 산다더니  나이 들어 이곳을 찾아 회상의 기로에 서니 아련한 추억들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풋풋하던 그때 초년병 선생 넷이서 이곳을 찾던 날의 모습이 생생이 살아난다. 
그날은 충주에서 기차를 타고 제천 단양을 거쳐서 풍기까지 왔었다. 풍기에서 부석까지는 버스를 타야하기에 부랴부랴 정류장에 도착하니 마지막 버스가 막 발차하려고 붕붕거리고 있었다.

“아저씨, 잠깐만요!”

 약속이나 한 듯 다같이 소리쳤더니 잠시 멈추어 주었다. 손에는 아이 스케끼 한 개식을 들고서, 만원버스여서 비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설레고 들뜬 마음으로 체면도 없이 무슨 말인가를 떠들어 댔는데도 차안의 사람들이 흘금흘금 곁눈질로 훔쳐보기만 할뿐 밉다는 표정들은 아니었다.

이렇게 부석까지는 왔지만 아뿔싸, 이게 웬일인가. 긴긴 여름해가 서산마루에 걸려있는데 부석사까지는 1시간 정도 더 걸어야 한단다. 기운도 없고 맥이 풀려 그냥 길가 풀밭에 털썩 주저앉아들 있는데 이게 웬 떡인가. 저만치 4톤 트럭한대가 털털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이리로 오고 있는 게 아닌가, 누가먼저 랄 것도 없이 양손을 이어 잡고 길목을 가로 막아 가까스로 차를 멈추게 했다.
 
“아니, 이아가씨들이 !”
 
운전기사가 양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때 밀 집 모자를 꾹 눌러 쓴 옆자리의 승려가 웃음 띈 얼굴로 빨리 뒤로 타라는 신호를 보낸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야! 신난다.’ 외치면서 거뜬히 짐차에 올랐다. 알고 보니 사찰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서 싣고 가는 길이었다.

그때, 우리가 근 10여일 기거 했던 요사채엔 모 대학 교수내외와 서울대학 법대생 4명이 같이 기거했는데 어쩌다 시간이 맞으면 노송에 걸려있는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산책하고 초롱초롱한 별빛이 유난히 반짝 이던 어느 날 밤에 조사당 잔디밭에 둘러앉아 손뼉치고 노래도 불렀고 설핏한 램프의 심지를 돋우며 도란도란 얘기꽃도 피웠다.
 법당 뒤 흐드러지게 피었던 그 청초하고 해 맑은 달맞이꽃, 달빛에 반사되어 일렁이든 대숲, 모두가 마음의 사진첩에 끼워져 있었다.

알다시피 부석사는 경북 영주 부석면 봉황산 중턱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며 676년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했다. 법당 무량수전은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천년의 숨결이 서려있는 곳이다. 본당왼쪽에 자리한 부석(선묘아가씨가 들어 올렸다는) 을 바라보며 선묘 아가시의 애틋한 사랑얘기에 열을 올리기도 했었지.

요사채 쪽마루에 눈이 가니 해 맑은 얼굴에 선한 눈빛을 지녔던 한 선승이 생각난다.
첫인상이란 때에 따라 참 묘한 마력을 지녔다고 할까, 고작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갔거나 아니 한 마디의 언질이 없다손 치더라도 어쩌다 생각나는 얼굴로 각인되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이 선승의 인상이 바로 그런 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내일 새벽이면 나는 저 산을 넘어 떠납니다.”

 그는 먼 하늘에 눈을 떼지 않은 채 고독에 찬 모습으로 얘길 했었다. 아마도 석장 짚고 바랑 메고 세월 따라 바람 따라 구름처럼 떠도는 운수납자(雲水衲子) 인가보았다.
이튼 날 새벽 은은한 도량석목탁소리를 뒤로하고 청회색 공기를 가르며 표연히 사라져가던 그 모습, 휘적휘적 예의 그 장삼 자락을 날리면서 ……. 지금쯤 고승이 되어 어느 절 주지승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름도 법명도 모르는 나로선 이렇듯 산사에 오게 되면 그냥 그때의 그 스님 인상이 떠올려지곤 한다.

시간이 꽤 되어 법당에 들려 하직 인사를 드렸다. 언제어디서나 부처님의상은 근엄하면서도 안온하다.

‘좋은 업을 쌓아라.’

 묵시의 훈시가 들린다.
법당을 나오면서 예의 그 고독에 찬스님의 등 뒤로 또다시 눈길이 갔다. 몇 번이나 말을 붙여보고 싶었지만 쉽게 근접할 수가 없다. 무슨 생각을 저리 오래 하실까, 갖가지의 상념이 스친다. 혹시 속세에 두고 온 애인을 그릴까. 다정한 어머니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걸까, 아무리 생의 진리를 찾아 큰 뜻을 품고 출가를 결심했다 하더라도 노모의 손목을 뿌리치고 동구 밖을 나서며 훔쳤을 그 눈물의 의미도 생각해 보았다.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고뇌와 갈등으로 숱한 밤을 지새웠으리라.

전처럼 응향각에 올라 겹겹 둘러친 신령스런 젖빛산등성이를 쳐다보며 가슴을 열고 묵었던 방안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지닌 채 그냥 산문을 나선다.


편안한 승용차에 몸을 싫었는데도 소녀 같은 여린 마음에 그리움과 고독이 밀려든다. 왜 그런가! 좋은 시절이 다가버렸기 때문인가? 아니면 인간은 원초적으로 누구나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죽어도 좋으리만치 좋아하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그래도 그럴까, 그렇다 해도 결국은 혼자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수행을 하는 구도자나 평범한 삶을 엮어가는 우리 속인들도 결국 삶 자체가 자기와의 싸움이고 보면 어찌 고독에 젖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독해야 생각을 깊게 하고 생각해야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고독, 고독은 역시 외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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