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

그 이름 불가사의 앙코르와트 / 기행문

목향 2008. 11. 30. 15:15

   (앙코르와트)    

 

그 이름 불가사의 앙코르와트                                                                                                                                                                                   김종선

                                 

                      

 세계7대 불가사의 앙코르와트, 세계 자연 문화유산 하롱베이, 우리국군이 참전했던 베트남 전쟁, 대 학살의 킬링필드, 이러한 말들이 떠 올려지는 역사의 현장! 그 곳을 그 언젠가부터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을 가기 위해 한 여행사를 통해 예약을 하고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던 중 어디서 들어 본적도 없던 생소한 단어, ‘사스’ 란 말이 신문지상에 오르면서 자연스레 취소되었다.

 

 이후 차일피일 미루다 드디어 2007년 벽두에 실행하게 된 것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해보니 우리일행은 가이드 포함 모두 20명이었다.( 친구6명, 서울 미동초교 여교사들, 정년퇴임교수 가족 등)

오전 10시30분, 인천공항 출발 비행기가 목적지인 ‘씨엔립’ 공항에 에 도착 했을 때는   이곳시간 16시 40분, (우리나라보다 2시간 늦다)호치민 공항에서 약 1시간 넘게 체류했  으니 결국 비행시간만은 무려 6시간이 걸린 셈이다.

이곳 ‘씨엔립’ 공항은 호치민 공항과는 다른 건축양식으로 누각을 세워놓은 듯 사방이 탁  트인 독특한 건물이며 아름다운 나무와 꽃들로 잘 가꾸어진데다 우선 청결함이 마음에 들었다.

호치민 공항에 내렸을 때는 이미 예상은 했었지만, 내리자마자 맞닿은 후덥지근한 공기, 오래된 건물인 듯 허술한데 대합실엔 쾌쾌한 냄새까지 났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오면서 호기심에 찬 눈으로 두리번거리는데 새로 만난 현지 가이드는 설명하기에  바쁘다.

“이곳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미 12세기경 앙코르와트를 세울 만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곳이지만 1867년 프랑스가 완전 식민지화했고 1953년 시아누크가 독립을 쟁취 국민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 미국이 사주한 군부의 쿠데타로 외국을 방문중 정권을 잃게 되고. 이어 론 놀이 등장 집권하게 되나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불안정 등으로 ‘론놀’ 정권이 다시 붕괴되고  크메르 공산당이 집권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크메르 지도자 ‘폴포트 ’의 자국민 대학살, 베트남과의 오랜 전쟁 등으로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는 요지의 설명이 장황했다. 설명이 아니더라도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터였고, 우리나라의 5,60년대를 상기할 만큼 가난한 나라임을 그냥 느낌으로 전해졌다.

 

 귀 기울여 설명을 듣다 보니 도착한 곳이 호텔, 최고의 특급 호텔이라고 연거푸 선전을 해대던 가이드의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시설이 좋아보였다.

호텔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저녁식사(특식 뷔페)를 겸한 ‘앞사라민속쇼’의 관람으로 이어졌다.

식당은 상당히 넓었고 화려한 음식메뉴가 눈길을 끌었지만, 국수를 워낙 좋아하는 나는 그 유명하다는 쌀 국수로 제일 먼저 손길이 닿았다.

 그 시원하고 구수한 국물 냄새,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도는데 아니, 이게 웬일, 나는 그만 첫 술에 역겨움을 느껴 토할 뻔 했다. 알고 보니, 고명으로 준비된 꼭 우리나라 부추같이 생긴 채소를 많이 넣은 것이 원인 이었다  

식당은 인종시장인 듯 붐비고 저마다의 언어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데 그중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높은 톤은 귀에 많이 거슬렀다.

 

 ‘압사라쇼’는 전통 춤으로 그들의 고유한 생활 풍습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무용수들은 휘황찬란한 색의 옷으로 치장하고 때론 야한 몸짓으로 시선을 끌기 위해 아주 열심이었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 관광차원으로 직접 국가에서 관장한단다.

그 유연한 허리동작이며 날렵하고 기교적인 손끝 놀림이 흥미로웠지만, 너무 피곤해서 빨리 잠자리에 들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다음날 8시 이제 본격 앙코르 유적관광이 시작된다.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관광버스에 올랐다.

이제 보고,듣고 느낀 것을 차례대로 적어보기로 한다.

 

1, 앙코르 톰

 

 가장 처음에 찾은 곳이 앙코르톰이다. 참고로 앙코르 톰은 도성을 의미하고 앙코르왕조의 마지막 수도이다. 자야바르만 7세가 37년간의 축조 끝에 건립되었다. 거의 사암으로 이루어 졌으며. 과거 크메르의 영화가 어떠했음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한 변이 3km 인 정사각형을 이루고 너비 약 10m의 해자(수로)로 둘러 쌓여있으며 왕궁을 비롯하여 바이온 사원, 피메니카스 신전, 타프롬 사원, 타케오사원, 바픈사원 ,코끼리 테라스 등이 있다.

북대문, 서대문, 남대문이 있고  동쪽에는 승리의 문과 사자의 문이 있다. 보통 관광객이 이용되는 문은 남문이다.

 

해자를 가로질러 들어가는 다리양쪽에 머리7개가 달린 나가(뱀) 이 길게 늘어져있는데 선과악의 신들이 뱀의 허리춤을 부여잡고 마치 줄다리기 하는 양상을 보여 퍽 신기하다. 좀 더들어가니 그냥 커다란 바위산이 내닿는다.

처음엔 그저 커다란 바위산을 보는듯한 느낌뿐이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진가는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냥 바위산이 아니다. 크기나 형태가 서로 다른 바위들을 끼워 맞춰 형상을 만들고 부조를 새기고 한 그 놀라운 기법에 감탄하게 되었다. 맨 위의 지붕 에는 200여개의 바위 얼굴이 있는데 (앙코르의미소) 관세음 보살상이라고 도하고 자야바르만 7세의 상이라고도 한단다. 아마도 왕족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과 합일한다는 믿음 때문이 아닐까.......

근엄한  얼굴상은 뚜렷이 보였고 천년세월을 변함없이 그 자비로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바이온 사원은 3층 구조로 되어있었는데 3층은 원형 탑으로 되어있다. 이 사원이 앙코르톰의 중심부에 있는 것으로 봐서  크메르 우주론의 메루산을 상징 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그 웅장함에도 있지만 외부 회랑의 석벽에 조각된 부조물인데 어떻게 저렇듯 정교하고 섬세하게 조각할 수 있었을까! 그 시절의 지혜와 기술이 놀랍다. 정말 신의 힘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조각상은 서민들의 생활상, 신  화, 전쟁, 용사들의 행렬 , 등 참으로 다양하다.

 

 세계의 고고학자들이 현대문명으로도 100년을 공사해도 다 못한다고 한다니 참으로 신비롭고 불가사의한일이다.

다음 순서는 타프롬 이 기다리고 있다.

 이 타프롬은 자야바르만 7세가 그의 어머니께 봉헌하기위해서 세워졌다는 말이 전해진다고 하는데 앙코르유적을 복원 하면서 이 사원만은 19세기 발견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에 가장 고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열대 무화과나무들( 쑤뿌엉)이 가지로부터 뿌리를 내려 사원의 벽과 지붕을 감싸 안고 있으며 사원을 무너뜨리고 있다.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돌기둥이며 불상, 말 그대로 폐허로 방치되어 신비롭고 감동적이다. 바로 영화 ‘톱 레이더’ 의 무대였다고 한다. 나는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 한 번 봐야 될 것 같다.

 

프랑스의 동,식물학자 ‘앙리무어’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무려 수세기를 밀림에 가려져있던 그 무정한 세월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과거 어느 시간으로의 회기를 가장 짙게 사색할 수 있고 잘 보여주었다고 할까,

무려 400여년이나  밀림에 가려져있던 이 유적을 발견했을 때 그 박물학자의 감동이나 충격이 어떠했을까를 자꾸 미루어 생각해보았다. 이어 왕궁터, 코끼리 테라스를 지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우리는 잠시 나무그늘에 앉아 코코넛을 빨대로 마셨다. 갈증을 느끼던 참이라 얼마나 시원하던지, 달 큰 한 그 맛, 바로 감로수였다.

 이곳의 겨울이 16일 이고 바로 지금이 그 일정에 들어있는 겨울이라는데 어찌 그리 더운지, 가장 시원한  여름옷을 입고도 손수건의 땀을 짜내기 바쁘다.

그러니 한 여름에 관광 오는 사람은 그냥 차안에 있기 일쑤란다.

이날 일정이 앙코르 유적 관광인데 앙코르와트를 제외한 모든 유적은 이렇게 오전 코스에  다 들어가 있었으니 그냥 대충대충 둘러본 느낌이라 좀 아쉽기도 하지만, 더 보라고 해도 너무 덥고 지쳐서 그냥 쉬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다.

 

오후 앙코르와트는 좀 잘 살펴보고 싶지만 글쎄다. 좀 젊은 날 찾아왔다면 소득이 더 클 텐데 아쉬운 느낌이다.

그래도 김치찌개로 점심을 먹고 나니,  조금은 피로가 풀리고 기운이 난다. 용기 백배 마음을 다잡고 앙코르와트를 향한 버스에 올랐다.

 

 2, 앙코르와트

 

 앙코르 유적의 진수, 크메르예술의 극치, 그 이름도 높은 불가사의 앙코르 와트! 잠시 후 마주 할 수 있다는 마음에 조금은 설렌다. ( 앙코르는 왕도를 뜻하고 와트는 사원을 뜻함)

이 사원은 앙코르톰의 남쪽 약1.5Km 지점에 있으며, 12세기 중 반경에 가장 전성기를 이룬 수리아바르만 2세가 힌두교 비슈누신과 일체화한 자신의 묘로서 건축한 바로 힌두교 사원이다. 바깥벽은 동서 1500m 남북 1300m 의 직사각형의 웅장한 규모이며, 다른 사원과 달리 정면은 서쪽을 향한다.

 

 차에서 내려 육교로 너비190m의 해자를 건너면 3기의 탑과 기다란 익랑이 그 웅장한 자태를 정면으로 보여준다.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우리일행 모두는 여기서 기념사진촬영을 했다.

다시 475m의 참배도로를 따라가면 중앙사원에 이른다. 중앙입구에서 사원내부까지 355m

사원의 주요건축물은 웅대한 방추형 세 겹으로 둘러싸인 회랑과 회랑의 네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해자와 더불어 사원이라기보다는 동양의 왕궁을 연상케 한다. 1,2,3층으로 되어있는데 3층의 중앙사당 탑은 우뚝 솟아 있으며 수미산을 의미한단다.(신들의 자리))

 1층 회랑을 돌면서 부조 물을 보게 되는데 정말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말들, 전투에 임하는 전사들, 선과악의 신들, 데바다(신분이 낮은 하급여신), 압사라(아름다운 무희들의 신), 여러 개 의 머리를 마치 부채처럼 치켜든 커다란 뱀 등 그 정교한 부조 물을 보면서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러나 한쪽 벽이 꽉 막혀서인지 그 후끈한 열기에 지쳐 그냥 쉬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다.

1층 회랑을 돌고나면 바로 2,3층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70도 경사의 가파른 계단 (33개) 을 올라야 하는데, 쳐다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지경, 더구나 발에 닿는 부분이 너무 좁아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는데 지난해에 다녀온 동생이 그 계단만은 절대 오르지 말라는 부탁도 있곤 해서 아쉽지만 포기했다. 우리 친구 중엔 유일하게 한 사람만 오를 수 있었는데 . 우리는 그 용기 있는 친구를 향해 다같이 박수를 쳐주었다. 오르지도 못한 주제에 무어 그리 재미있다고 계단을 힘겹게 엉금엉금 기어오르는 모습들을 보면서 얼마나 웃었던지. 지금도 그 모습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난다. 3층 그 높은 신들의 자리, 그 성스러운 곳 (성소)을 가기위해선 최대 자세를 낮추고 가야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었단다. 

 

계단을 못 올라 그 성소를 실제로 볼 수 없었던 일은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있지만, 그래도 좌측으로 돌아드니 바로 2,3층 그대로를 축조한 모습이 있어 십자형 주랑, 그것을 둘러싼 회랑 목욕소 같은 것들을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 사원의 뛰어난 미술적 건축 양식은 인도의 영향도 받아드리기는 하였지만, 모든 면에서 앙코르왕조의 독자적 양식을 지니고 있다니 그 부조물의 정교함과 조화로운 균형미, 엄청난 위용 등 당시 화려했던 문화를 엿볼 수 있었고 그 신비함에  더욱 매료된다. 해는 서산으로 많이 기울고 이날 무려 7시간이나 걸은 셈이다.

 

 호텔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니 몸은 무거워도 무언가를 잘 해낸 듯 뿌듯한 마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 가지 걸리는 것은 그 애절한 눈빛의 어린이를 외면하고 그냥 버스에 오른 것이 다. 그곳엔 어린이들의 구걸행각이 곳곳에서 귀찮을 정도로 많다. 물론 그 애들에게 단 얼마라도  다줄 수는 없지만 나를 끝가지 따라붙었던 한 아이, 왜 하필이면 내가 일행에 뒤처져 막 뛰고 있을 때 손을 벌렸을까,

30분의 자전거를 타고 와 겨우 2천원을 버는 노동자들이 많다고 했는데  단돈 천원이라도 그 애 손에 쥐어 주었어야 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

 한 친구가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 얼른 거울을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내 얼굴은 햇볕에 익어 홍당무가 되어있었다. 이 주름진 얼굴에 검버섯 까지 끼게 되는 건 아닌지, 잠시 걱정하면서 지나는 사람을 보니 서양인들은 하나같이 다 나와 같다. 서양인도 아닌 나는 왜 그럴까?

 

 이어 발 마사지 체험 장으로 향한다. 10불을 더 주면 전신을 받는다고 권하는데 약간의  결벽성인 나는 누군가 내 몸에 손대는 것이 싫어 그냥 호텔로 가고 싶었지만 친구모두가 희망한다니 혼자 떨어 질 수도 없어 합세 했다. 그 역겨운 향냄새, 세탁했는지도 모를 가운 등 좀 기분이 떨떠름했지만, 때리고 당기고 늘리느라 그 소녀는 땀을 뻘뻘 흘렸다. ‘한 참 어린 나이일 것 같아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그 덕에 그 화끈거리던 얼굴이 오이 마사지로 인해 좀 수그러진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날은 너무나 고단한 덕분일까, 아주 잠을 잘 잤다.

 

  3. 킬링필드와 톤레샆 (똔레샾) 호수

 

 ‘죽음의 뜰’ 이란 의미의 킬링필드, ‘프높펜’ 남부12km지점에 위치하며, 크메르루즈 치하의 대학살의 현장으로 ‘롤랑조페 ’감독 영화 ‘킬링필드’ 제작이후 킬링필드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킬링필드’ 유령 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자꾸 영화 킬링필드에서 해골이 무더기로 발굴되던 한 장면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1975년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함에 따라 친미인 ‘론놀’ 정권을 몰아낸 크메르루즈의 지도자 ‘폴포트’가 농민 천국을 건설한다는 미명아래 대 학살을 자행한 곳이다.

 도시인을 농촌으로 이주시키고, 사유 재산,종교를 폐지했으며, 과거정권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전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약 200만 명의 자국민을 무참히 학살 시킨 것이다. 총알이 아까워 비닐이나 자루를 씌워 생매장도 했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유령탑 안에는 당시 희생자들의 상당한 해골이 쌓여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문득 언젠가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나치독일에 의해 희생당한 유대인들의 잘려진 그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떠올라 긴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극한의 절규로 울부짖다 저렇듯 무참하게 죽어간 것일까,

인생무상이라 했든가, 이렇듯 대학살의 장본인 ‘폴포트’도 베트남의 침공으로 북쪽 산악지대에서 운둔생활을 하다 한 정글 지역에서 이름도 없이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벽면에는 살인마 ‘폴포트’의 초라한 죽은 모습의 사진이 붙어있었는데 그 사진을 멀거니 바라보자니 많은 생각들이 일었다.

그 어떠한 이념이라도 선량한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귀한 인간의 목숨보다 앞서는 것이 무얼까!

 다음 행선지는 동양최대 크기의 톤레샾 호수다. 캄보디아 면적의 15%를 차지한다고 한다.  메콩강 수위를 조절하는 호수로 캄보디아인들의 생활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단다. 가는 도중 시엔립 시내를 통과했는데 길가에는 그냥 멀거니 앉아있는 사람, 느릿한 걸음, 등으로 미루어 역동적인 느낌은 없었지만, 울타리위로 올라온 아름다운 꽃나무, 화분에 심겨진 자잘한 꽃을 대하니 그들의 심성은 소박 할 거라는 느낌도 들었다.

 

 그들이 지금은 가난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옛날 저렇듯 찬란한 앙코르의 유적을 남긴 선조들의 핏줄을 이어받은 후손이니, 지도자의 영향에 따라선 얼마든지 밝은 앞날도 기약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도자의 영향 !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들의 선조들 덕분에 지금 세계 각국에서 이렇듯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지 않은가! 하루에도 약 1만5천 여 명, 우리나라 사람만도 1주에 6천명의 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 든다고 하니 참으로 엄청나다.

 

 상점이나 건물의 간판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많았는데 그것은 문맹인 (문맹50%) 이 많아 서란다. 예를 들어 치과는 가지런한  치아를 들어내고 환히 웃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림들이 아주 재미있게 그려져 있었다. 시내를 벗어나니, 흙먼지가 풀풀 나는 비포장도로로 접어들고 이어 바다 같은 호수가 보였다. 바로 톤레샾 호수다. 시선을 멀리 두었지만  보이는 건 수평선이다. 물은 황토색이며 잔잔했다. 호수 도로변으론 꼭 우리나라 원두막 같은 집이 줄지어 있었는데 저렇듯 열악한 환경에서 어찌 사람이 살 수 있는지, 배설은 어디에, 식수는 어떻게 해결할까?

참 사람 사는 모습 각양각색이다.

 

 조금 더 달리니 수상가옥 촌이 나왔고 우린 버스에서 내려 초라한 유람선으로 옮겼다. 서서히 움직이는 배안에서 이색적인 수상가옥들을 살핀다. 한 눈에도 그들의 생활은 너무도   궁핍하다. 마음 한 편으로 그들의 삶이 참으로 안쓰럽게도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동정 받을 일은 전혀 아니다. 그래도 학교, 슈퍼, 이발소등 웬만큼 생활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나라 선교 단체에서 지어주었다는 태극기가 중앙에 선명하게 그려진 학교를 보니 반가웠다. (아주 작은 미니 학교) 개인이나 단체나 남을 도울 수 있다면 돕고 더불어 사는 것이 사람 사는 이치 일터.

 

 그러나 분명한 것은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그들보다 더 행복지수가 높다고 감히 말 할 수 있을까!

찌그러진 양은 대야 같은 그릇에 달랑 들어앉아 양손으로 노를 저으며, 뱅글뱅글 돌면서 재잘거리는 저 까만 머루 같은 눈망울의 아이들이 컴퓨터 앞에서 오락게임에 빠져있거나 무리한 학원수업에 시달리는  우리아이들 보다 더 불행하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조금 더 가니 선상 휴게소가 나왔고 우리는 잠시 배에서 내려 자리를 옮겼다.

사진 한 장 담기위해 2층으로 올라서니 아무도 없다.

 

 난간에 기대서 멀리 수평선에 눈길을 주니 불현듯 북경에 살고 있는 손자가 생각난다.

아니다. 잠시 잊은 것뿐이지 항상 내 가슴에 그 애가 존재 한다고 해야 옳은 말이다. 분명 딸이 손자 보다 더 가까운 핏줄일 터인데 나는 손자가 더 보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희로애락 (喜怒哀樂)을 겪으며 살아간다.

잠시 사색에 잠겨 뒤를 돌아본다.

지금까지의 내 생애에서 가장 즐겁고 기쁜 일은 무얼까, 여러 가지의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밀려온다. 그중 몇 가지가 앞자리에 다가 앉는다. 물론 대단한 일은 아니다.

 

 우선 아이들의 무난한 대학입학과 밥벌이, 남편의 승진, 1명 뽑는 교사 임용고시에 큰애가 합격 했던 일, 나의 문단등단 등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머리위에 올려놓아도 되는 일은 손자의 출생을 꼽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큰애가 임신 7개월 일 때 초음파 검사를 하던 의사가

    “아들이네요.”

 아! 그때의 그 감격,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내가 딸만 셋을 두어서도 아니고, 아들을 선호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여기에 그 이유를  밝히지 못하지만, 그것은 오직 큰애의 평안을 위해서다. 나의 솔직한 생각은 결혼을 했다면 아들이든 딸이든 하나면 된다는 쪽이다.

 

 다시 배를 타고 갔던 길을 되돌아와 버스로 옮겨진 우리는 북한 사람이 운영하는 평양냉면집 앞에서 내렸다. 식당은 꽤 컸고 쌈밥과 냉면을 번갈아 들면서 북한 아가씨들의 공연을 보았다. 춤도 잘 추고 간드러진 북한 특유의 음색으로 노래도 잘 불렀지만 20세 전후의 그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자태 또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음식도 이번 여행 중 제일 내 입맛에 맞아 참 맛있게 먹었다. 별것도 아닌 무생채, 콩나물 무침도 하나같이 상큼하고 냉면 또한 언젠가 북경 옥류관에서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그 맛 그대로다. 북한이 앞세우는 음식 바로 그 냉면이 아닌가! 

역시 북한 냉면 맛은 알아줘야한다.

 

 점심 후엔  쇼핑순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코스지만, 현지상품을 잘 고르면 후회 없이 덕이 될 때 도 더러는 있었다.

그들의 상술에 마음약한 나는 몇 번이나 고개를 젓다가 그만 또 지고 말았다. 그 즘 잠을 잘 못 자서인지 어깨와 목 줄기가 땡 겨 고생을 하는 참인데 고무나무에서 원료를 추출해서 만들었고 목과 어깨를 잘 받혀주어 편 한잠을 잘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가 베개를 두 개 샀다. 하나는 내 것 하나는 애들 아빠 몫, 말없이 여행을 잘 보내주는 고마움의 표현이다.

 

 이제 밤비행기로 베트남 (하노이)으로 가는 순서다.

언제나 떠남은 섭섭함을 지니게 마련, 또다시 올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보통 밤 비행기 이 착륙 시엔 휘황찬란한 보석처럼 빛나는 수많은 전등불의 황홀함에 시선을 뺏기곤 했는데 이곳엔 그 빛이 없다. 워낙 전력 사용을 절제 하다보니 그런 모양이다.

 

 가이드 왈, 월 100만원 생활비에 50만원이 집세고 25만원이 전기세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만난 옆자리의 한 후배교사와 이런 저런 교육현장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훌쩍 2시간이 지나 비행기는 착륙준비를 시도하고 있었다.

여행은 낯선 것들과의 만남이 아닌가.  

끝으로 같이 여행 한 일행들, 특히 방 짝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 앙코르 와트 앞 연못을 뒤로하고 ....                                                     

 

                                                                           *톤레샾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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